[백년 전쟁 왜곡과 진실] 이승만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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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다시 뜨겁다. 유튜브 조회수 2백만 건을 넘긴 좌파 단체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 ‘백년 전쟁’이 논쟁에 불을 붙였었다. 이 영상은 이승만을 ‘불륜, 횡령, 가짜 독립운동의 주인공’이라 비난하지만, 증거사진까지 합성해 허위 사실을 주장한 것이 드러나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이들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백년 전쟁’으로 규정하며 거짓 영상까지 유포시킨 것은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反證)한다. 역사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 오늘의 전쟁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열쇠다. 이승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대한민국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1945년 8월 15일 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한 두 나라의 태도는 크게 달랐다. 미군은 해방 3주가 지나서야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은 인접한 한반도까지 공산주의 혁명을 확산시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소련은 미국보다 지리학적으로 한반도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소련이 2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한 이유는 러일전쟁에서 잃은 한반도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윌리엄 스튝 미 조지아대 교수)
소련군이 장악한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먼저 주도권을 쥔 것은 좌익이었다. 해방 바로 다음날(1945.8.16) 여운형의 좌익 세력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수립한다. 그 뒤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여운형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쥐면서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한다. 1945년 한반도는 공산화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있던 것이다. 이 때 한반도 공산화를 저지하는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왜 우리가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가.”(이승만이 해방 직전 맥아더에게 보낸 서한) “당신의 동생이라도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면 이제 동생이 아니다. 그들은 조국을 소련에 넘겨주려 할 것이다.”(해방 직후 이승만의 발언)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인가?
좌파 인사들은 지금도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불러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한 것은 김일성 정권이다. 19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임시법령 제정, 집행, 처벌권까지 있는 사실상의 정부였다. 이 후 인민위원회는 실제로 국가기능을 수행한다.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뒤 “우리는 통일조국을 고대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됐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라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나온 것은 이로부터 넉 달이나 지난 1946년 6월 3일이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모든 정치세력의 대동단결을 요청하고 박헌영과 장시간 담판하며 통일 정부를 모색했다. 그러나 곧바로 공산혁명을 꿈꾸는 공산주의자들과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민족주의자 김구 역시 박헌영과 합작을 시도했지만 박헌영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합작 시도를 결렬시켰다. 김구는 그 후에도 좌우합작을 시도했으나(1948.4 연석회의 참석 위해 북한行) 김일성의 북한 정권 수립에 명분만 제공하며 이용당했다.
순진했던 미국, 현실을 간파한 이승만
소련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한국 단체를 모두 미소 공위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좌익 단체들은 이미 소련의 지령에 따라 돌연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상황이었다. ‘찬탁’ 단체만으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은 한반도 공산화의 욕심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이런 상황 속에서 남한까지 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미국은 1946년까지도 통일 정부를 추진했다. 미 군정청 장관 하지 준장은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하기까지 한다. 순진했던 미국보다 오히려 이승만이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을 정확하게 간파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이 돼서야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방침을 결정한다. 실제로 정부가 수립된 것 역시 남쪽은 1948년 8월 15일이지만 북한은 여섯 달 빠른 1948년 2월 6일 북조선 인민공화국을 공식 선포하고 헌법을 채택했다.
이승만이 꼭두각시인가, 김일성이 꼭두각시인가?
김일성은 당시 33세, 소련군 대위 출신이었다. 항일 운동을 했다지만 그가 내세우는 보천보 전투를 비롯한 몇 개의 ‘업적’들은 집권 이후 턱없이 과장, 신격화된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중국 공산당 항일 게릴라인 팔로군 산하의 대대급 지휘관이었다. 이승만은 누구인가. 좌익이 주도한 인공이 1945년 9월 7일 발표한 내각 명단을 보자.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대리 조동호 김계림 외무부장 김규식 대리 최근우 강진 재무부장 조만식> 그는 공산주의자들조차 ‘간판’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민족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가 귀국하자 대대적인 국민 환영회가 열렸고(1945.10.20), 정치적 라이벌 김구도 “뭉치면 이승만이고 흩어지면 삼천만이다. 이승만에게 뭉쳐야 우리가 산다.”고 할 정도였다.
누가 꼭두각시 정권인가?
김일성의 북한 정권과 남한의 좌익은 소련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돌변해 찬성하는 등(1946.1) 그야말로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6.25 전쟁도 소련의 윤허와 지원 아래 일으킨 사실이 흐루시초프 회고록을 통해 이미 공개됐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때로는 대립, 반목하고 때로는 이용, 설득하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미국은 이승만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더 싫어했기 때문에 이승만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 미 군정청 장관은 “이승만은 그의 반소(反蘇) 언동 때문에 미국이 한국에서 추후 설립할 어떤 정부에도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1947년 한때 미군정은 그를 가택 연금하고 전화까지 끊었다. 그는 미국의 괴뢰가 아닌 ‘용미(用美)’의 현실주의자였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그렇다. 좌파의 주장대로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은 통일 국가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공산주의 국가’ 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인민’으로 김정은의 통치를 받고 있을 것이다. ‘무지하거나’ 또는 ‘이념에 눈이 먼’ 일부 좌파 인사들은 공산주의 통일 조국이 수립돼야 했는지, 불가피하게 남쪽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켰어야 했는지의 물음 앞에 정직해야 한다.
공산화 직전의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 대한민국의 기틀을 놓은 공로, 그리고 6.25 전쟁에서 조국을 지켜낸 공로는 결코 부정돼서는 안 된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대한민국도 부정된다. 다큐 ‘백년 전쟁’은 표지에서 교묘하게도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등과 ‘백년 전쟁’을 벌인 얼굴로 안중근, 김구, 여운형 등을 내세우고 있다. 그 자리에 진짜 들어가야 할 얼굴들, 지금도 ‘백년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물은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 3대 부자, 그리고 지금도 김씨 왕조의 지령을 받고 있는 종북 세력이다.
‘백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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