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진실] 이승만 ‘정읍발언’은 소련 전략 꿰뚫은 현실적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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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갈림길
북에 ‘친소 정권’ 수립 지시한 스탈린의 비밀 문건 속속 공개
1946년 2월 사실상 정부 설립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 =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대한민국 건국의 모태가 되는 언급이다. 흔히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라 불린다. 이후 이승만에겐 ‘분단의 책임자’란 비난이 따라다녔다.
#1948년 2월 22일 미 군정청 = 하지 중장의 초청으로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우익의 세 거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승만의 단정노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론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보려는 자리였다. 김규식은 “조국의 분단이 결정되는 이때에 우리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터이니 염려 말라”고 맞섰다. 역사의 갈림길이었다.
48년 4월 19일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은 새벽부터 웅성거렸다.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길에 오르려는 김구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이들 사이의 실랑이 때문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길을 이승만은 막지 않았다. 통일정부란 명분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성과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소련의 선제 단정 기획 = 6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미·소 군정 3년간 남과 북에서 각기 국가 수립이 추진됐고, 비슷한 시기에 각각 건국을 했다. 단독정부 추진의 선후를 굳이 따지자면 북한이 먼저다. 그럼에도 이승만에게만 ‘분단의 원흉’이란 비난이 따라다녔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폄훼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이다. 그 족쇄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회주의권 붕괴 후 옛 소련의 기밀문서가 하나 둘씩 공개되면서부터다.
결정적 증거는 45년 9월 20일 북한에 내려진 스탈린의 지령.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내용이다. 소련의 의도는 북쪽에 먼저 친소 정권을 수립하고, 이어 한반도 전체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전형적인 위성국가 건설 수순이 그랬다. 소련이 한반도의 통일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소련식 통일국가’를 의미할 뿐이었다.
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려 ‘북조선중앙은행’ 설립을 결정한다. 독자적인 경제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 46년 2월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된다. 신탁통치와 미·소 공동위원회 활동 같은 남쪽과의 협상은 협상대로 진행하면서 동시에 별도로 단독 정부를 만드는 일을 추진한 것이다.
북쪽에선 소련의 의도대로 정부 수립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반면 남쪽에선 정파 간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북한에선 이미 실질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남한의 우익세력을 배제하려는 소련의 정책이 드러난 직후에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제기됐다. 서울대 정치학과 황수익 명예교수는 “당시 소련 점령 정책의 목표와 북한 정권의 성격을 간파한 남한 우익의 유일한 지도자는 이승만이었다”고 평가했다.
◇순수한 의도… 이용당한 애국심 = 5·10 총선을 보이콧하며 김구와 김규식은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평양에 가기 전인 4월 12일 이미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비밀지령이 김일성에게 전달된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지령은 구체적이었다. “유엔한국위원회의 비법적 결정에 저항하고 유엔한국위원회의 즉각 철수를 요구할 것” “남조선 단독선거를 거부하도록 호소할 것” 등이다. 실제 남북연석회의는 소련 문건대로 진행됐다.
남쪽 인사들이 평양에 체류하던 4월 24일에도 소련 정치국의 또 다른 비밀문건이 전달된다. 북조선의 헌법을 수정하라는 내용이다. 이 또한 거의 그대로 반영된다. 48년 2월 3일자로 북조선 군대의 집회를 허가한다는 소련 정치국 문서도 최근에야 발굴됐다. 헌법·군대와 같은 핵심적 국가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이미 48년 2월 무렵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진보 학계에서도 이 같은 발굴 성과를 수용하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2008년 여름호)에서 기존의 좌파적 해석을 넘는 시각을 선보였다. “분단 질서 고착에 관해 일방적으로 이승만의 책임을 묻는 것은, 역사 기록들이 보여주고 있듯 실제 사실과 다르다. 북한의 선제적 체제 구축과, 김구 역시 국가 수립을 추구하다 막판에 전향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5·10 총선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민의 투표로 결정한 역사상 최초의 정치적 이벤트였다. 그러나 통일 우선주의를 내세웠던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비현실이 아니라 당위와 부당위 사이의 선택이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신복룡 석좌교수는 “사상 첫 총선을 코앞에 두고 평양에 가는 것은 역사 현장의 도피였다”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김 회담에서 통일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한마디도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 ‘정읍발언’은 소련 전략 꿰뚫은 현실적 대응
▲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아래로 드리워진 현수막에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이다"라고 쓴 것이 또렷이 보인다.
북한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기는 하지만 이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단독정부가 세워졌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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