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관련 진실]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탈출과 한강교 폭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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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 시 최고 지도자는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휘해야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320km나 떨어져 있었고,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도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1,100km나 떨어져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도쿄(東京)는 미국의 B-26전략폭격기 공격기지인 사이판(Saipan)이나 괌(Guam)으로부터 무려 1,600km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일본과의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선에서 항상 300-4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이는 국가원수가 포함된 전쟁 지도부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도 테러와 같은 비상 사태 시에는 극비 장소에 은신하여 지휘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 이승만이 전쟁 시에 서울을 탈출한 것은 상식적인 행위이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노블 참사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장관과 고위관리, 국회의원들이 한강을 넘어 피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후일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만약 서울 사수를 고집하고 어물거리다가 정부 요인이 한꺼번에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면 정부가 와해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6월 27일 새벽 주한미국대사관은 700여 명에 달하는 미국인들을 인천항의 선박편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문을 보내 “무초 대사가 서울에 남을 특별한 이유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인민군이 들어오는데 대사와 외교관들이 자발적으로 포로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인민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의 속도나 성능, 무장능력 등을 고려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가지도부의 피신은 너무 빨랐던 것이 아니라 시기를 놓친 셈이다.
국가 위급 시에 군 통수권자의 안전지대로의 피난은 전쟁 지휘와 국가의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지도자의 피난을 이처럼 몹쓸 언어를 동원하여 비난하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냉정히 꿰뚫어 봐야 한다.
2. 6.25 전쟁 당시 서울을 떠난 이시영 부통령, 서울에 머무른 교황청 대사의 엇갈린 운명
이종찬 전 국정원장 :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부록 <60년 전, 6.25는 이랬다>
“다음날 찾아온 파나마 모자 쓴 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과거 신흥무관학교도 나왔고, 의열단 활동도 했으며 한때 중경과 연안을 드나들며 임정(臨政)요인들과 조선 혁명당 간부들 사이에 연락업무를 해오던 사람인데 그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했고 6·25동란 직전 북에서 파견하여 사전 작업하기 위하여 침투활동 중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중국 망명시대에도 성재 할아버님(이시영 부통령)을 만났던 인연으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통령 부재 중에 부통령이라도 서울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바람을 잡고 할아버님의 피란을 극구 방해했던 것이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할아버님을 앞세워 일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아마 그 때문에 다음 날, 할아버님을 놓치게 되자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나는 또 그 연장선에서 상상해 봤다. 만약 성재 할아버님이 순전히 애국적인 입장에서 서울을 사수하였다면 서울이 점령당한 후 파나마 모자 같은 북의 공작원이 틀림없이 모셔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북을 대표하는 김일성이나 김두봉 - 특히 김두봉은 중국 혁명시대 동지였다 - 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통령이 회담을 통하여 어떤 불리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면 이 전쟁 상황은 어떻게 변질되어 발전되었을까?
틀림없이 북은 남쪽의 부통령이 항복했다고 선전했을 것이요, 그 순간 대한민국은 침몰되었거나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여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청 대사관의 대표였던 패트릭 번(한국명 방일은·方溢恩) 주교는 일부 외국인 성직자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뒤 교황 대사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7월 11일 보좌역인 부드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패트릭 번 주교는 서울 소공동 삼화 빌딩에 감금됐다가 인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번 주교는 이후 인민군이 후퇴할 때 북한으로 끌려가 평양감옥, 만포, 고산진, 초산진,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을 잇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며 극심한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 1950년 11월 25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순히 자기 한 사람의 목숨을 건지려고 피난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소재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이다. ‘자연인 이승만’의 ‘피란’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이전’이었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국가를 보위’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에게 소총수들처럼 총을 들고 나가서 적과 싸우다 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보전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을 보전했다. 대통령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3. 이승만의 서울 탈출과 방송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240여 대의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이승만은 9시 30분 경 경회루(慶會樓)로 낚시를 하러 갔고, 같은 시각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이 북한의 남침에 대해 처음 보고를 받은 것은 낚시를 하던 중인 10시경이었다.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남침 상황을 보고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오전 10시 30분경 신성모 국방장관(국무총리서리 겸임)이 경무대로 들어와 보고드릴 긴급 상황이 있다면서 ‘오전 9시에 개성이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춘천 근교에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이때까지도 대통령과 각료들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장난치다 그만 두겠지’라고들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충돌들이 자주 일어나곤 했었기 때문이다. 신성모 국방장관도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마침내 대통령의 피난 문제가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6월 26일 밤이었다.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정부 각료들이 대통령의 피난 문제를 거론했다.
6월 26일 밤 9시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경무대로 와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천 명의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이므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의 전반을 지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완강히 거부했다.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들었던 6월 27일 새벽 2시.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 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급히 찾아 왔다. 그들은 “사태가 급박합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라면서 간곡하게 건의를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안 돼! 서울을 사수해야 돼!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말하고는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 여사가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다. 그러니 일단 수원까지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다’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말에 이승만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 때 경찰간부 한 사람이 들어와서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메모를 전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이승만은 남하를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정보는 사실이 아니었고, 대통령의 남하를 재촉하려는 참모들의 꾀였다고 한다.
6월 27일 새벽 3시 30분, 이승만은 기관차와 3등 객차 2량으로 만들어진 특별열차에 탑승하여 남하하기 시작한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고, 옷가지도 챙기지 못했으며, 특별열차는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고 한다.
특별 열차는 대구까지 갔다. 하지만 이승만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을 주장해서 대전으로 돌아갔다. 기차가 대전에 도착하자 소식을 들은 윤치영과 허정이 왔고, 그들은 서울이 이미 점령당했으니 더 이상의 북상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이때까지도 이승만은 서울행을 고집하고 있었다.
잠시 대전역 사무실에서 쉬고 있는데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장관은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더 이상 북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고, 수원까지라도 가야겠다고 했다. 사실 그때까지 서울은 점령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역시 더 이상의 북상을 막으려는 참모들의 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유엔이 대북 군사 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무기원조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암담했던 분위기는 이 소식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북상을 단념하고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이승만 대통령의 숙소는 충남 도지사 관저였다.
그날 밤에 무초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왔다. 무초 대사는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았다’며 “전쟁은 이제부터 당신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다”면서 미국의 적극 개입방침을 설명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방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보처장과 상의한 후 서울중앙 방송국으로 전화를 해 6월 27일 밤 10시에 방송을 하기로 했다. 내용은 “유엔과 미국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 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였다.
방송이 나가고 4-5시간이 지난 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이로 인해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승만이 혼자서 도망쳐놓고 국민들에게 거짓말로 방송했다, 본인이 살기 위해 국민을 인질로 잡히게 했다, 대통령이 건너자마자 한강 다리를 끊었다, 등등의 왜곡이다.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승만과 정부는 6.25가 대규모의 전면 남침임을 알 수 없었다. 당시 휴전선에서 수백번의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기에, 그와 같은 소규모 충돌로 생각했다.
2) 6.25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북한의 전면 공격임을 깨닫고 국가의 수호를 위해서 대통령이 피신했다. 이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3) 측근들에 의해 대구로 피신했던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갈 것을 고집해서 대전까지 갔다. 그곳에서 무초 대사로부터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에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
4)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국군 수뇌부는 계획대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4. 한강 인도교 폭파
1) 북한은 한강다리가 끊어지기 전에 점령하려고 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함과 동시에 한강교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이를 위해 남침 당시 수도권에 그들 전력의 2/3이상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1개 밖에 없는 1개 전차여단과 1개 모터싸이클(motorcycle) 연대까지 투입시켰다. 전차여단은 한강교 점령 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1, 2001, 138쪽)
우리가 한강교를 끊기 전에 북한이 먼저 점령하는 것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의미이다.
2) 우리 정부의 한강교 폭파 계획
27일 새벽 2시 경 신성모 장관, 조병옥, 이기붕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회의가 열렸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주장했다. “정부가 강을 건넌 뒤 한강다리를 폭파해야 된다. 이는 적이 쉽게 도강(渡江)할 수 없도록 할뿐만 아니라, 서울에 남아 있는 국군이 퇴각할 길이 차단됨으로써 보다 완강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롤드 노블 저, 박실 역, 『戰火속의 대사관』, 40쪽.)고 주장했다.
3) 한강교 폭파
전쟁 초기 국군이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바로 적 전차의 위력 때문이었다. 국군 수뇌부가 한강교를 폭파하는 기준도 적 전차의 서울시내 진입에 두었다.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온 후, 2시간 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는 적 전차의 도하를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북한군의 추격도 따돌릴 수가 없었다. 북한군의 전차는 6월 28일 00:30-01:00에 서울시내에 진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2, 16쪽.)
이에 군에서는 한강교 상의 인도교를 비롯하여 철교들을 폭파했다. 그때 시간이 6월 28일 02:30분이다. 광진교는 이보다 늦은 04:00에 폭파됐다.
4) 한강교 폭파의 결과
한강교가 폭파되자 북한군 전차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서울시내에서 귀중한 3일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반대로 국군은 한강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다. 국군은 한강선을 방어하기 위해 시흥지구전투사령부(始興地區戰鬪司令部)를 설치하여 김홍일(金弘壹)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 북괴의 남침과 서전기』제1권(개정판), 710쪽)
북한이 한강교를 점령하기 전에 국군이 폭파한 것에 대하여 소련 군사 고문단은 북한군에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서울을 점령한 후 [북한군] 각 부대가 행한 극단적으로 완만한 행동과 개별부대 지휘관들의 임무유기로 인하여, 적[국군]은 한강을 도하하고 교량을 파괴했으며, 남쪽 강변에 방어선을 조직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며 북한군 수뇌부의 작전미숙을 강하게 질타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183-184쪽.)
한강교 폭파는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군의 피해가 있었지만, 전쟁의 전체국면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국군은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을 수 있었고,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던 북한군 전차를 저지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국군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한강방어선을 형성했다. 바로 그 한강방어선을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시찰했다. 방어선을 둘러본 맥아더는 지상군의 투입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미국의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고,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했으나, 만약 국군이 그때 한강방어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면 유엔안보리의 결의는 무위로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유엔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공산이 매우 컸다.
결론적으로 한강교 폭파는 대한민국을 살리고 미국과 유엔의 참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5)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책임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던 채병덕 육군 참모 총장은 6.25전쟁 중에 전사했다. 이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 정부는 실제로 폭파를 지휘했던 최창식 공병감을 처형했다. 1962년 재심에서 폭파 명령의 책임은 채병덕에게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최창식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했다.
5. 김일성의 사례
김일성이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떠난 것은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1주일 전인 10월 12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6월 27일 새벽 3시경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특별열차’라니 대단해 보이지만,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낡은 객차들을 급히 편성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청천강변에 이르러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이 차는 나중에 국군에게 노획되었다.
"그들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김일성도 급히 평양을 빠져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타고 북상하다가 결국 청천강 변에 자동차를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도망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김일성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백선엽, 6. 25 징비록>
김일성의 피신 행적은 분명치 않다. 북한 당국에서는 백두산에서 끝까지 항전을 지휘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김일성은 자신이 평양을 떠나기 이미 열흘 전에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를 만주 창춘(長春)으로 피난을 보냈다. 김정일은 만주 길림학원에 입학, 1952년 말까지 2년 동안 초등학교 과정을 중국에서 공부했다.
자식들을 일치감치 중국으로 피난시키고 자신도 행방이 묘연하게 탈출했던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승만을 비난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6. 이승만이 피신하지 않고 한강다리도 끊지 않고 국민들을 먼저 탈출시킬 수 있었을까?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에 열세한 국군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후방에 있는 모든 부대까지 전선으로 동원해야 했다. 병력수송을 위해 열차가 동원됐다. 이 와중에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서울시민에 대한 피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중공군 개입 후 1·4후퇴 때, 정부는 미군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20여일에 거쳐 서울시민을 피난시킨 적이 있었다. (전상인, 「6·25전쟁의 사회사」, 『한국과 6·25전쟁』, 184, 214쪽;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236쪽.)
그때는 전선도 38도선 부근이었고, 시간도 20여일이나 되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최소한 이 정도의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100만명이 넘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남침 직후 2-3일 만에 서울시민을 피란시킨다는 것은 당시 정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한다고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정부의 여력으로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송수단도 없었고, 피란민이 이용할 도로는 군사용 도로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기에 북한군 전투기는 공중공격을 감행했다. 서울은 격전지로 변하고 있었다.
서울시민을 안전하게 피란시키고,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도 온전히 철수한 다음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일지 모르나 당시 전쟁 상황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다. 만약 이때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서울시민의 안전을 위해 매달렸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대통령과 정부의 그런 노력에 서울시민은 안전하게 피란할 수 있었을까? 북한군은 서울시민이 피란하고 국군이 철수하도록 그냥 보고 있을까? 만약 시민피란과 국군철수를 동시에 실행에 옮긴다고 하더라도, 도로와 교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짧은 시간에 이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서울시민을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이 아니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전쟁 상황에서 당시 정부의 능력을 고려할 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동선(動線)은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극비(極秘) 중의 극비사항에 해당된다. 전시에 국가원수가 위난을 피하기 위해 피란을 간다고 공개적으로 알린 예(例)는 고금을 통틀어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또 대통령이라고 해서 전시에 모든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 1.4 후퇴 당시, 이승만은 서울 시민을 먼저 대피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서울시민을 놓고 피란을 했지만, 국가원수로서 서울시민을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바로 후회를 하고 이를 바로 잡았다.
1951년 1·4후퇴 때, 이승만 대통령은 악몽과 같았던 남침직후의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이승만은 전쟁 초기 서울시민을 피란시키지 못한 점을 회한(悔恨)으로 여기다가, 마침내 1·4후퇴 이전 그는 20여일에 걸쳐 군과 행정 관서를 총동원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무사히 피란시켰다. 그리고 대통령 자신은 가장 늦게 서울을 떠났다.
그는 국민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며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현명한 국가지도자였다.
댓글목록
최연님의 댓글
최연 작성일혜존님의 댓글
혜존 작성일Neutrality님의 댓글
Neutrality 작성일깨어있는 지성인이라면 들어서 아는 것이아니라 봄으로써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람임을 스스로 천명하는 본인은 이승만의 선택은 지극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확고한 생각을 다집니다. 분명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낸 선택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겨진 기록들과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발언록을 기반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분명한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은 저버리려는 생각을 하지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6.25 특별담화에 대한 잘못된 점은 서울에 머무르던 시민들에게 피난 명령을 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저 미국에서 날라온 귀중한 참전 소식을 전하는 것에 몰두하여,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려는 것에 머무르지말고 피난 명령도 함께 했어야하는데 이 부분은 조금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승만이 직접 서울 시민들에게 서울은 안전하니 서울에 남으세요 라고 말하며 본인은 도망쳤다고 사실을 왜곡 하여 호도하는 자들은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그러므로 중상모략에 능한 적이자 악이라 칭할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