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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이해_18편_달래강 제8편 - 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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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85회 작성일 18-05-2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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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편 -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다


소련과 중공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가 터졌다.
이승만은 80세에 가까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주 전선과 훈련소를 찾아 군인들을 격려했다. 지프차로 위험한 산길을 달리기도 하고, 작은 정찰기를 타고 적의 포화를 피하기도 했다.
1951년 9월, 이승만이 강원도 양구 북방의 전선을 시찰할 때는 쌍발기가 적의 포화를 피하기 위해 나무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고, 돌아올 때는 폭우로 임시정부가 있는 부산이 아닌, 대구 동천비행장에 내린 적도 있었다. 예고 없는 도착이라 30분이나 지나서 지프차가 마중 나왔고, 병사들과 야전식으로 끼니를 때운 후 폭우를 뚫고 지프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중에도 미국과 대립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했는데 장면이 뽑힐 가능성이 높았고 내각제로 개헌하자는 움직임도 거셌다. 농지개혁에 반대해 온 지주정당 한민당 계열이 반이승만 중심세력이었다. 이승만은 계엄령을 펴서 국회의원을 잡아넣고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다. 소위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진통일 주장만 하는 이승만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던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검토했다. 하지만 이승만을 대체할 리더십이 없고 후방에서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쿠데타 계획은 철회되었다.

휴전협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은 협상의 백미다.
주지하다시피 미군은 빨리 휴전협정을 맺어 한반도에서 철수하려고 했고, 이승만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마지막으로 정식 항의문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 “만일 중공군을 북한에 둔 채 휴전협정을 체결한다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그 경우에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도 좋지만, 공중 폭격, 야포 사격, 함포 사격의 지원만은 계속해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에 이승만은 다시 양유찬 주미 대사를 통해, “만일 한국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휴전이 된다면, 한국군을 유엔군으로부터 빼내겠다”고 또 다시 미국을 협박했다.

그러나 휴전 방침을 굳힌 미국과 유엔은 휴전협상을 강행했고,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이 한국정부의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휴전을 하려는 데 대해 분개했다. 특히 유엔 측이 북한이나 중공에 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을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넘겨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자는 공산측의 요구에 양보했던 것에 대해 수용할 수 없었다.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그럴 수 없었다. 북한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들이, 친공적인 중립국 대표들의 압력과 설득에 의해,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게 할 수는 없었다.
중립국 가운데서도 특히 친공적이고 친소적인 인도의 군대가 모든 경비를 맡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인천항에 도착한 인도군의 상륙을 거부했고 인도군은 할 수 없이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마침내 이승만은 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헌병사령관 원용덕에게 비밀리에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던 것이다.

1953년 6월 18일 새벽2시였다.
거제도 등 전국의 수용소에 나뉘어 있던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들은, 한국군이 유엔군 초병들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쏜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60여 명의 반공포로가 미군 경비병들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나머지 포로들은 무사히 탈출하여 경찰들이 안내하는 민가에 숨었다.

판문점에서 휴전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가장 큰 쟁점은 반공포로 처리 문제였는데, 미국 측은 자유의사 송환, 공산 측은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면서 2년간 휴전협상을 끌어왔던 때였다. 그 사이 전선에선 치열한 고지전으로 엄청난 희생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이승만의 이 돌출행동은 “미국이 포로 문제를 양보하고 적당히 공산군측과 합의를 보고나서 서둘러 한국을 떠난다면, 한국군이라도 단독으로 북진하여 휴전협상을 깨겠다”는 각오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세계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산군 측을 분노케 하여 휴전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강력한 어조로 항의했다. 유엔 참전국들도 격렬히 항의했다.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알려진 영국 수상 처칠은 극단적인 용어로 이승만을 비난했다.

미국은 또 다시 ‘에버 레디 작전(Ever Ready Operation)’이란 이름으로 이승만 제거계획을 세웠지만, 부산정치파동 때와 같은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고 결국 이승만을 달래지 않고서는 휴전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서울에 파견하여 3주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물게 하면서 이승만과 힘겨운 협상을 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해 주는 조건으로 ‘한미동맹 체결’, ‘경제원조’, ‘무기지원’을 요구했다. 휴전으로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북한의 재남침 위험이 너무 커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미국이 약소국 한국과 상호방위동맹을 맺는 데 찬성할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이 상호방위이지, 누가 미국을 침공하며 한국이 어떻게 미국방위를 한단 말인가?) 그 때문에 회담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회담이 진행되는 사이에 이승만은 한국에 대한 미국 국민의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극적인 성명서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예를 들면, 1953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지금 한국인들의 반공투쟁이 18세기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독립투쟁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는 내용의 방송연설을 했다. 그 방송을 듣고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이승만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왔다. “한미동맹의 결성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주 의회들도 있었다. 허스트 계통의 신문들을 비롯한 우파 성향의 신문들은 지지 논설을 실었다.

휴전협정 체결 직전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승만의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를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승만은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은 동맹자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측근에게도 “우리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적을 만난 것 같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해 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8월 3일, 한미방위조약 체결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을 서울로 보냈다. 이승만과 덜레스는 해방 전부터 알던 사이였지만 한미동맹에 대한 두 사람은 입장은 크게 달랐다. 덜레스는 대한민국이 다시 북한의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은 군사원조의 의무만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공산세계에 대한 자유세계의 싸움에서 대등한 동반자로 보고 미국은 아낌없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합의했고 10월 1일 정식으로 조인했다. 그 조약으로 이승만은 적어도 미군 2개 사단을 한반도에 주둔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군 20개 사단의 무장에 필요한 군사원조와 경제부흥에 필요한 장기적인 원조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미국과 세계를 향한 이승만의 벼랑끝 전술이 한미동맹이란 한국의 생명줄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한미동맹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 이승만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수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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