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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빛나는 업적 - 이승만의 『농지개혁』 당시 시대상황과 농지개혁의 효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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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1,263회 작성일 18-10-2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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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지개혁으로 두산그룹, 선경그룹, 한화그룹 등이 탄생되어

지주들은 유상몰수 된 농지의 값으로 지가증권을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수령해 부산으로 피난을 가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해방 후부터 올라가던 물가는 전쟁으로 폭등했다. 1945년에 100의 물가가 ‘50년에 3,000, ‘53년에는 50,000 정도까지 날아간 반면 지가증권 값은 지주들의 생활비 조달로 인한 투매로 폭락해 지가증권 실질가치는 몇 푼 되지 않았다. 지주들의 막대한 토지 재산이 녹아버린 탓으로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해 한국의 산업화는 요원했다. 이승만 정부는 지가증권이 가치 없이 증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매수한 지가증권으로 해방 후 일본인들이 놓고 간 귀속재산의 매입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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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증권, 발행일이 1950년 5월 31일이다


한국전쟁 시 액면가의 20-30% 정도로 저렴하게 매입한 지가증권을 귀속재산 불하받을 때 본래의 액면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대금 납부도 분할상환이어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그 당시에는 대단한 특혜였다. 전쟁 중이어서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위험이 있음에도 도전 정신이 있는 젊은 사업가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귀속기업을 매입했다. 이때 박두병씨가 두산그룹의 모태인 소화 기린 맥주(현 OB 맥주)를 최종건씨는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을 김종희씨도 한화그룹의 모태인 조선화약공판(후에 한국화약)을 저렴하게 매입한 지가증권을 사용하여 불하대금의 상당액을 충당해 매수했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라 한다. 농지개혁이란 급변화와 한국전쟁의 위기가 도전정신의 젊은 사업가들을 위대한 기업가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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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맥주 공장의 전신인 소화기린 맥주공장




5. 이승만은 조선 선비정신과 미국 청교도 자본주의 융합한 국가 창조 원해

이승만은 조선말 과거 합격을 위해 유학과 성리학을 상당 수준으로 공부해 그의 한시(漢詩) 창작 능력과 서예 솜씨는 일품이었다. 또한 미국 명문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해 동서양 학문에 통달한 그는 세계 최고의 지성인이라 미국 정치인들과 고위관리들도 그를 어려워했다. 그는 미국정부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실패하여 공산당들을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최고 악질로 생각했다. 그런 그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을 시켰을 만큼 그는 현실을 직시하는 실용주의 정치가였다. 아래 도표와 같이 그의 성공적인 농지개혁은 박정희 정부 경제개발의 초석이 되어 한국경제의 기적을 달성하게 했다. 반면 한국보다 자원이 훨씬 많아 부유했던 필리핀과 중남미 여러 국가들은 농지개혁을 못해 경제개발에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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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만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할 정도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경무대(현 청와대) 뒤뜰에서 매일 도끼로 장작을 패는 전형적인 한국인이었다. 그의 꿈은 한국을 선비정신과 기독교 정신이 융합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 4.19 혁명 때 국민이 원하는 대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고 무일푼으로 하와이로 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사랑하는 조국 한국 가기를 병석에서 매일 학수고대하다가 1965년 7월 91세로 운명하였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 표와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병석 중에도 이발비 5달러를 아끼려고 부인이 머리를 깎게 해 돈을 모았다. 정부와 언론도 그의 귀국을 막아 시체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지만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송을 받고 있다.




[출처] 프리미엄 조선 -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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