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서 빛나는 업적 - 이승만의 『농지개혁』 당시 시대상황과 농지개혁의 효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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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951회 작성일 18-10-23 15:54본문
1년 내내 기생집에서 놀아도 재산이 늘어 가는 대지주들
1.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하고 불쌍한 소작농들
소작농(小作農) 제도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친일 지주 보호와 한국 쌀의 일본반출을 위한 목적으로 육성되었으며 해방 당시 전인구의 70% 이상이 농민인데 농민의 8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소작농들은 지주(地主)들에게 소작료로 산출량의 50%를 지불해야만 했다. 악덕 지주들은 산출량의 70% 이상을 소작료로 징수하기도 했다. 당시 소작농들이 소작료를 내고 손에 쥐는 평균 소득은 쌀 2.2석(4가마)이었다. 이 쌀 4가마로 6-7 명의 가족이 일 년을 살아야 했으니 그 생활은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작농들은 땅 1평, 집 한 간도 없어 지주들이 내 쫓으면 그야말로 가족 전체가 길바닥에 나가 앉아 당장 굶을 수밖에 없어 지주들에게 그저 엎드려 빌며 노예와 같이 살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소작농가의 실제 모습이다.
▲ 소작농의 집
소작농들에게는 인권이라 것은 없었고 매일 흰 쌀밥을 먹는 지주 집의 개(犬)가 부러울 정도였다. 소작농들은 봄이 되면 식량이 바닥이 나 산에 가서 칡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고단한 삶을 죽지 못해 이어가야만 했다. 가난에 찌든 소작농들은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대장이 말라붙고 대변이 밤알처럼 굳어져 항문으로 나오질 못해 대변 볼 때마다 항문이 찢어져 피가 났다. 이 가난을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하다.”라고 표현했다. 배운 것이 없는 이들은 죽도록 농사를 짓고 뼈가 부서지도록 고생을 하여도 자기 땅 1평도 못 가져 보고 지주들에게 수탈과 멸시를 당하다가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소작농들이 전 인구의 60% 정도였으니 소작농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국가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었다.
2. 일 년 내내 기생집에서 놀아도 계속 재산이 늘어 가는 대지주들
비참한 소작농의 생활에 비해 대지주들은 일제에 동조만 하면 천국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1천석(약 2천 가마)의 대지주라 하면 소작인들로부터 1년에 쌀 1천 가마를 회수할 수 있는 농지를 소유했다는 뜻이다. 아주 큰 대지주는 만석꾼이라 했는데 1년에 쌀 1만 가마가 수입되는 대부자였다. 당시 공업 생산이란 거의 없어 농업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1년 국가총생산액의 대부분인 쌀 총생산량이 1500 만석(약 3000만 가마) 정도였던 일제 강점기에 한 명의 지주가 매년 1만 가마의 쌀을 순수입으로 가진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재산 가치였다. 이들 지주들이 소작료로 받은 쌀이 거의 모두 일본에 반출되었는데 약 250만 평 이상의 논을 소유해야 만석꾼이 될 수 있었다. 아래는 만석꾼 집의 실제 모습이다.
▲ 만석꾼의 집
1천석 이상의 대지주들은 적어도 25만 평 이상의 논을 소유했고 소작농이 100가구가 넘었다. 대지주는 자기 집 주위에 작은 초가집들을 백여 채 이상 지어 놓고 소작농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서 경작하게 하였다. 즉 대지주 집을 중심으로 해 하나의 마을을 형성했고 지주들은 그 안에서 제왕으로 군림했다. 대지주들은 마름이라는 관리인을 두고 소작농을 비롯한 모든 관리를 맡겼는데 이 마름들이 때로는 지주들보다 더 소작농들을 괴롭히며 갑질을 했다. 대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로 소작농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살았으며 일 년 내내 기생집에 가서 흥겹게 논다고 해도 재산은 계속 불어났다. 그러니 유상이든 무상이든 지주들이 농지를 몰수당한다는 것은 대낮에 날벼락을 맞는 것보다 더했다.
[출처] 프리미엄 조선 -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