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이해_18편_달래강 제5편 - 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과 무장투쟁론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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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1,765회 작성일 18-05-17 01:05본문
제5편- 실력양성론(민족개조론)과 무장투쟁론도 주장했다
외교독립론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승만이 국민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노력을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하와이에서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하면서 교포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 지리 등 민족교육을 시켰다. 학교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감리교 본부가 한인·중국인·일본인 학생들을 구분하지 않고 교육시킴으로써 보통의 미국시민을 육성하려고 하자, 본인이 기독교도임에도 이승만은 과감하게 감리교 선교부와 손을 끊었다. 감리교 교육방침을 받아들이면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역사 교육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승만은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기숙사를 갖춘 ‘한인기독학원’을 세웠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제 학교였다. 당시 한인소녀들은 전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에 학교를 남녀공학으로 했다. 그는 벌써 남녀평등주의자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정 문제가 복잡하게 돌아갔고, 그래서 이승만이 학교 운영자금을 횡령했느니 하는 말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당시 미국의 재산권과 교육제도 즉, 민법과 교육법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입장이 안된다. 예를 들어 교육법 등이 바뀌면서 이승만이 운영했던 한인학교 졸업생은 정규학교 졸업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위기같은 것이 있었는데,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생략하겠다.
다만 이승만은 기차표 한 장까지 일일이 모으고 기록했을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가 죽은 후 축재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운영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러 싸움과 법정다툼은 대개가 모함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증 중의 하나로 인천의 인하대학교가 이승만이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돈을 종자돈으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와이 교포들과 국내유지들의 성금, 그리고 국고보조 등도 있었다.) 인천은 하와이 교포 1세들이 이민갈 때 떠났던 항구인데, 인하대학교라는 이름도 인천과 하와이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무장투쟁론도 그렇다.
이승만이 줄곧 무장투쟁론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 이유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때가 되자 이승만은 무장투쟁론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그 때란 바로 미·일 간의 전쟁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승만은 무장투쟁을 추구한다. 중경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면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구의 임시정부도 이승만을 ‘주미외교부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승만은 관계가 좋아진 임시정부에게 ‘대일 선전포고’를 하도록 하고, 미국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보내오도록 했다. 이승만은 그 성명서를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스탠리 혼벡에게 제출했지만,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미국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뛰었다. 당시 미국에는 적성국 식민지 국민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주는 ‘무기대여법’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 법에 근거하여 무기를 달라고 미국정부를 설득했다. 한국군을 일본과의 전쟁에서 활용할 수도 있고, 일본 패망 뒤에는 소련의 한반도 점령(공산화)을 막을 수가 있어 일거양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간첩인 앨저 히스같은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정부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어 역시 실패했다.
당시 미국정부에는 소련간첩 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그 때만 해도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할 때였기 때문인데, 국무부에는 특별정치국장 앨저 히스를 비롯해 극동정치국장 존 카터 빈센트, 핼도어 핸슨, 존 스튜어트 서비스, 올리버 에드워드 클라브, 한국문제 담당관 조지 맥퀸 등이 있었고, 재무부에는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있었다.
앨저 히스는 나중에 얄타 회담과 유엔 창립총회를 주도했던 F.루즈벨트의 최측근이었고,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케인즈와 더불어 브레튼우즈 협정과 IMF를 주도적으로 만든 인물이다. 2차대전 후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 역역의 국제질서 축 2개를 만든 자들이 좌빨이었던 것이다. 이는 2차대전 전후 미·소협상 때마다 미국이 소련에게 양보했던 것, 해방 전 이승만이 미국정부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했던 것, 해방 후 남북합작 문제 등에서 이승만이 악전고투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승만을 만난 앨저 히스는 나찌와 싸우고 있는 미국의 동맹국 소련을 비난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며 화를 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전후 국제문제를 처리하려는 좌우합작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한 반공·반소주의자인 이승만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은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동구와 발칸반도가 공산화되거나, 루즈벨트가 장개석에게 압력을 넣어 모택동과 국공합작을 하도록 만든 것이나, 이의 영향과 장개석 정부의 압력을 받아 김구의 중경 임시정부가 1942년 김규식·김원봉 등 공산주의자들과 손 잡고 좌우합작 체제로 바뀌었던 것도 모두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보면 국제질서라는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건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2차대전 전후 소련의 급팽창 또는 세계적인 공산화 현상은 미국의 좌우합작 전략에 근본원인이 있었고, 이런 전략의 배후에는 미국정부에서 암약하는 좌빨들이 있었다. 이런 막강한 국제질서에 성공적으로 저항하거나 이를 역이용하여 성공한 세계 유일의 신생국 지도자가 이승만이었던 셈인데, 이승만은 “좌우합작 = 공산화” 라고 철석같이 믿어 이를 본능적으로 거부했기에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는 이후 많은 사례에서 확인된다.
이승만은 과거에 알고있던 미 육군전략국(OSS) 소속 프레스턴 굿펠로우 대령을 찾아갔다. 굿펠로우는 대일전에 한국인들을 활용하라는 이승만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는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한인청년들을 훈련시킨 후, 일본이나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활동과 파괴활동을 벌이게 할 ‘냅코(NAPKO) 계획’을 세웠다.
장석윤을 비롯한 19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선발되어 1942년 12월 4일부터 샌프랜시스코 연안의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무선·폭파·촬영·낙하산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후 그들은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들의 승인을 기다렸지만, 중국전구의 웨드마이어, 태평양지역의 맥아더, 태평양지역 해군사령관 니밋츠는 냅코작전이 기존의 전투력을 분산시킨다는 이유로 승인을 꺼렸고, 그러는 사이에 일본이 항복했다.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씨도 냅코 프로젝트 특공대원이었다.)
이승만은 국회 설득에도 나섰다. 친한 변호사나 기자들을 대동하고 상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미 국무부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 국무부가 임시정부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방침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성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한국교포들을 적국민으로 대우하지 말라”며 미 법무부에 냈던 청원이 1942년 2월 받아들여진 사실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미국인들도 일본에 적의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미국정부의 대일본 여론조작도 작용했다. F.루스벨트는 1942년 2월 포고령을 발동하여, 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는 재미 일본인들을, 적성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륙 등 격리된 지역에 만든 ‘재정착 수용소’에 강제로 격리, 수용했다. 이 때문에 종전 후에도 미국은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한국인이라는 국적이 없었던 재미교포들도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차별대우를 받았었는데, 이승만이 해결했던 것이다. 분명히 미국인들의 분위기가 바뀌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