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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24. 韓吉洙주도 반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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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38회 작성일 18-06-10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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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기간 이승만(李承晩)박사에게는 추종자도 많았지만 배척자도 많았다. 왕족(王族)이라는 신분배경,고매한 학식,그리고 능란한 외교술 등 李박사의「장점」을 높이 사는 사람들은 그를 불세출(不世出)의 위인으로 숭앙하면서 물심양면으로 기꺼이 도왔다. 1921년 하와이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는 바로 이러한 親李박사계 인사들의 후원조직이었다. 다른 한편 李박사의 유아독존적 행동양식과 외교독립노선에 거부감을 느끼고 그를 백안시하는 세력이 있었다.
1910년대에 결성된 안창호(安昌浩)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박용만(朴容萬)의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등은 바로 이러한 反李박사 세력이었다. 1920년대초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워싱턴에서 李박사와 함께 일했던 김규식(金奎植)도 미국을 떠난 후 중국에서 李박사 비판세력에 합류했다.
1930년대 말에 접어들어 일제(日帝)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아연 활기를 띠었으며, 독립운동가들 간에는 「노쇠」한 이승만에게 반기를 드는 새 라이벌들이 대두했다. 1941년4월에 발족된 재미한인연합위원회(在美韓人聯合委 員會)의 김호(金乎).김원용(金源容).한시대(韓始大)등은 대한인국민회 계통의 실력자들로서 이승만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데 힘을 모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승만이 독단으로 운영해온 한국위원부의 참여폭 확대 내지 개조를 요구했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자 그들은 1944년 워싱턴에 별도의 사무소를 설치하고 독자적인 임정 승인획득운동을 펼쳤다.
이승만에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지도부보다 더 무서운 라이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한길수(韓吉洙). 이승만보다 25년 연하(年下)인 한길수는 장단출신으로 여섯살때(1905) 하와이로 이민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자랐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하와이로 돌아간 그는 부동산중개업에 종사하다가 위증혐의로 면허취소를 당한 후 한 때 駐호놀룰루 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37년 하와이를 방문한 美의회 의원단에게 일본인의 군사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상원의원 질레트의 신임을 얻었다. 한길수는 김규식이 1933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부식(扶植)한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이라는 대일(對日)방첩(防諜)단체의 미주대표중 한 명이었다. 1938년말에 워싱턴DC로 거처를 옮긴 그는 중한민중동맹단 1937년 한커우(漢口)에서 조직과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워싱턴 대표자로 행세했다. 한마디로 그는 1942년 이후 중칭(重慶)임정내에서 야당(野黨)을 형성하는 김원봉(金元鳳)과 김규식에 연계된 미주내 이승만 타도운동의 선봉이었다.
일본 정보통(情報通)으로 인정받은 한길수는 미국 국무부. 해군부를 드나들면서 이승만 격하에 열을 올렸다.「고집불통 노인」이승만이 표방하는 무저항주의적 외교독립노선과 반소(反蘇).반공(反共)주의가 비현실적.비효과적인 항일독립전략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의 이러한 논리는 광복 후 좌우합작(左右合作)과 연립정권 수립을 지향한 것이었다. 한길수의 입장은 전후(戰後)한국문제 처리에 있어 소련과의 협조가 필수라고 보는 美국무부의 용공(容共)적인 고문 히스의 대한(對韓)정책 구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美정부의 호감을 샀다.
워싱턴을 무대로 빚어진 이승만 지지세력 對 비판세력간의 파쟁은 급기야 미국 및 중국정부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을 일삼는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부정적 선입감은 이승만이 추진하던 임정 승인 획득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1945년4월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유엔창립총회에 한국대표단의 참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승만과 한시대가 이끄는 두개의 한국대표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회의 참석권을 얻으려고 서로 겨루던 끝에 간신히 단일(單一)팀을 구성하는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공교롭게도 이 총회의 사무총장직을 맡게된 히스는 한국대표단의 「내분」을 환히 알고 있던 터라 한국인이 제출한 서류의 접수조차 거부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가.그는 한길수.김원봉.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간주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길수는 미국 내 한국 「빨갱이」의 두목이오 왜놈의 「사냥개」「이중간첩」이라고 지목,경계했다. 그는 한길수가 美정부 요인들에게 한국인의 「내분」을 너무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임정 승인을 방해했다고 분격해했다. 나아가 그는 미국정부가 소련과의 협조를 우선시한 나머지 한국인에게 무분별한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경우 전후 한국에는 폴란드의 루블린정권과 비슷한 소련 괴뢰정권이 탄생할 것이며, 이어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에내전(內戰)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9월 초 어느날 이승만은 가장 절친한 미국친구 올리버에게 자기는 앞으로 좌우합작으로 이루어지는 연립정부에 참여, 집권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하고 천하대세(天下大勢)가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시골에 은퇴해 「닭이나 치겠다」고 토로했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4.韓吉洙주도 반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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