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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20. 주변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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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740회 작성일 18-06-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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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보아 이승만(李承晩)박사는 여복(女福)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혼 후 6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출옥하자 5년 이상 미국에 유학,독신생활을 했다. 1912년에 첫부인 박승선과 헤어진 그는 1934년 프란체스카 돈너여사와 재혼할 때까 지 20여년간 하와이에서 홀아비생활을 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외로웠는가. 하와이의 이승만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미남인「박사」홀아비를 은근히「사모」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사진결혼」으로 하와이에 건너와 가정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똑똑한」여성들로서 하와이 여러 섬에 산재한 한인교회 및「부인구제회」라는 단체를 통해 이승만의 정치자금을 거두는 일 등에 앞장섰다.
이들 외에 이승만을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주는 인텔리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노디(김해)김(Nodie Kimhaikim)양…나중의 손노디(Mrs. Nodie Sohn)여사. 원명이 김혜숙인 그녀는 황해도 곡산출신으로 여덟살 때(1905년 5월)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갔다.  하와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버지 김윤종씨가 만주로 훌쩍 떠나자 그녀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오빠.누이동생과 더불어 어렵사리 자라났다.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정착한지 2년째인 1915년 그곳의 카후마누 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이승만의 추천으로 美본토로 건너가 오하이오州의 우스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후 그녀는 오하이오州의 명문 오버린 대학에 진학, 1922년 역사.정치학 분야의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재학시절 필라델피아「한인대표자대회」(1919년4월)에 참석,열변을 토해 각광을 받은 바 있는 그녀는 대학졸업 후 하와이로 돌아가 워싱턴에 머무르고 있는 이승만을 대신해「한인기독학원」원장직을 맡아 일했다.
동시에 그녀는 다른 親이승만계 단체들,예컨대「한인기독교회」「동지회」「부인구제회」「한미친선회」「한미상담회」등의 이사 내지 회장직을 맡아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녀는 정부수립후 이승만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53년11월부터 55년2월까지 외자구매처장(外資購買處長)직을 맡아 일했으며 그후 58년 하와이로 돌아갈 때까지 적십자사(赤十字社)부총재.인하대학교 이사(理事)직등을 역임했다.
노디 김이 하와이 망명객 이승만을 이토록 오래 가까이서 보필하다 보니 두사람간의 관계에 대해 주위에서 쑥덕공론이 무성했다. 그녀는 35년(즉 이승만이 프란체스카 돈너와 결혼한 다음해)에 호놀룰루의 상처(喪妻)한 교포실업가 손승운(Syung Woon Peter Sohn)씨와 결혼했는데 그 당시 그녀에게 딸려있던 만8세의 딸 위니프레드 李(Winifred Lee:일명 이보경)의 친부(親父)가 누구냐가 「뜬소문」의 핵심이었다.
이승만을 헐뜯는 쪽에서는 위니 프레드가 이승만의 딸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위니프레드 남바(Mrs.Winifred LeeNamba)여사가 집필한『손노디 약전(略傳)』에 따르면 노디 김은 27년에 이병원(Pyeung Won Lee)이라는 사업가와 잠시 결혼한 일이 있는데 이 때 이씨에게서 얻은 딸이 바로 위니프레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위니프레드의 친부는 이(Rhee)승만이 아니라 이(Lee)병원이라는 주장이다.
노디 김 외에 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에게 접근한 한국여성으로서는 임영신(任永信)을 손꼽을 수 있다. 전라도 금산태생으로 3.1운동 때 전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 일제 감옥에서 6개월간의 영어(囹圄)생활을 했던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廣島)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귀국후 그녀는(공주)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23년말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출국때 그녀는 유태영(柳泰永.柳泰夏의 형)의 요청으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때 일제가 한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첩을 몰래 숨겨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마침 그곳을 방문중인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두사람은 서로 믿고 아끼는 동지가 되었다.
임영신은 그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남가주대학교에 입학,학부와대학원과정을 마치고 1931년 신학(神學)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임영신의 전기에 따르면 그녀는 졸업후 귀국에 앞서 워싱턴을 방문했고 이때 그곳 한인교회의 이순길(李淳吉)장로(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영선수 세미 李의 아버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승만의구혼(求婚)을 받았다. 임영신은 이 문제를 가지고 십여일간 번민했다. ***求婚받고 고민도 오빠들과 친구들에게 상의한 끝에 그녀는 미혼의 젊은 나이로 결혼 전력(前歷)이 있는 50대의「노인」과 결혼하는 것이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모처럼의 청혼을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승만을 흠모한 그녀는 이때부터…이승만의 이름에서 딴…승당(承堂)이라는 아호(雅號)를 지어 애용했다.
해방후 이승만이 단신 귀국하자 그녀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서울에 도착할 때(1946년3월25일)까지 윤치영(尹致瑛)내외와 함께 돈암장. 마포장에서 이승만의 비서역을 충실히 담당했다.
그 후 그녀는 이승만의 추천으로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유엔전권대사로 미국에 건너가 눈부신 외교를 벌인 끝에 정부 수립후 초대 상공부장관으로 기용됐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0.주변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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