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19. 歐美위원부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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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640회 작성일 18-06-10 20:02본문
이승만(李承晩)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근거로 외교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워싱턴에 설치한 자신의 활동본부를 「한국위원회」라 칭했다.「한국위원회」는 3.1운동때부터 해방 이후까지 간헐적으로 개설되다 정부수립후 주미(駐美)대사관 으로 바뀌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내지 「임시대통령」직을 맡았던 1919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이 위원회는 「구미위원부」라 불렸다.임정 최고지도자였던 이승만은「구미위원부」를 통해 어떤 일을 했던가.
3.1운동후 「집정관총재」로 추대,임명된 이승만은 1919년 5월초 워싱턴에 「한국위원회」 일명 「집정관총재 사무실」을 개설했다. 그는 이 무렵 필라델피아에 「한국홍보국」과 「한인친우회」를 만들어 홍보활동을 펴고 있던 서재필(徐載弼)과 제휴, 독립운동을 본격화했다. 6월에 접어들어 파리강화회의가 소득없이 폐막되자 이승만은 파리에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8월25일을 기해 「집정관총재」직권으로 「구미위원부」를 발족시키고 김규식을그 위원장으로 임명했다(일년남짓후 玄楯이 대리). 이로써 교육 및 종교 배경이 같은 미주(美洲)의 3대 독립 운동가들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된 셈이다.
3.1운동후 「집정관총재」로 추대,임명된 이승만은 1919년 5월초 워싱턴에 「한국위원회」 일명 「집정관총재 사무실」을 개설했다. 그는 이 무렵 필라델피아에 「한국홍보국」과 「한인친우회」를 만들어 홍보활동을 펴고 있던 서재필(徐載弼)과 제휴, 독립운동을 본격화했다. 6월에 접어들어 파리강화회의가 소득없이 폐막되자 이승만은 파리에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8월25일을 기해 「집정관총재」직권으로 「구미위원부」를 발족시키고 김규식을그 위원장으로 임명했다(일년남짓후 玄楯이 대리). 이로써 교육 및 종교 배경이 같은 미주(美洲)의 3대 독립 운동가들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된 셈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청년들을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기용했다. 그의 심복 정한경(鄭翰景), 대한인국민회의 대표 이대위(李大爲),그리고 하와이 국민회의 대표 송헌주(宋憲澍)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외에 미국인 변호사 돌프가 위 원부의 법률고문으로,그 리고 김노디와 매이본 두 여성이 사무원으로 추가 채용되었다. 이승만은 위원부의 당연직 위원으로 위원부 일을 총괄.감독하는 몫을 맡았다.
구미위원부 성립후 이승만이 1차적으로 착수한 일은 독립운동자금을 풍족히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전과 같이 교포들의 애국금과 인구세 그리고 국내에서 비밀리에 송금되어온 의연금 등만으로는 독립운동을 제대로 추진할수 없다고 판단,「대한민국」명의의 공채(公債)를 발행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는 기발한 착상을 했다.
이승만은 9월1일부터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만들어진 공채표(公債票)를 발매했다. 공채표는 10,25,50,1백,5백달러 등 5種이었고 연리(年利)6%에 미국이 한국정부를 승인한 1년뒤에상환(償還)한다는 조건부였다.
위원부는 미주와 하와이는 물론 멕시코.쿠바.칠레.캐나다 등지에 있는 교포와 화교(華僑)들에게 공채표를 팔아 1921년까지무려 8만5천8백55달러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금액은(1921년 기준)위원부 총수입의 약65%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해외 독립운동단체가 갹금한 독립운동자금 중 최고액이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구미위원부는 어떠한 일을 했는가.우선 상해임정에 매달 1천달러 이상의 자금을 송금해 임정의 명맥을 보존하는데 일조(一助)했다.
이와 비슷한 액수의 돈을 서재필과 황기환(黃玘煥)에게 보내 그들이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각각 발간하는 영문 및 불문 월간잡지『한국평론』과『자유한국』,그리고 다른 많은 독립운동 관련 저서.팸플릿 출판을 지원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내 21개 도시와 런던.파리 등 유럽의 주요도시에 「한인친우회」를 조직, 그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2만5천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미국인 헐버트교수와 벡목사 등 위원부의 「선전원」은 이들 도시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구미위원부가 치중한 사업중 하나는 미국의회 의원들에게 접근,상하 양원에서 한국 독립문제를 토의케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19년 후반부터 미국의회에서 한국문제가 심심찮게거론되었다. 급기야 1920년3월17일에는 상원(上院)본회의에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한국독립승인안이 상정되어 표결에 부쳐졌는데 아일랜드案은 38대 36으로 가결되었지 만 한국안은 애석하게도 34대 46으로 부결되었다.
구미위원부가 추진한 최종. 최대의 사업은 1921년11월부터 1922년2월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군축회의(일명「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구미위원부는 상해임정.국내 각종단체및 뉴욕 유학생단체(공동회)등의 후원으로 이 회의에 이승만.서재필.정한경.돌프.토머스로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한국대표에게 발언권을 주거나 본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구했다.
***끈질긴 설득 실패 그러나 회의 주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일본등 제국주의 열강이 이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이승만 등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워싱턴 군축회의의 폐막을 고비로 서재필은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본업인 의업(醫業)으로 복귀했다. 이에 앞서 1920년10월 워싱턴을 등지고 상해로 떠난 김규식은 1922년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노력자회의」에 참석,미국등「흡혈귀」국가들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거푸 고배(苦杯)를 마신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축소,정리한 다음 하와이로 돌아가 후일을 기약했다.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그는 나름의 독립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구미위원부 성립후 이승만이 1차적으로 착수한 일은 독립운동자금을 풍족히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전과 같이 교포들의 애국금과 인구세 그리고 국내에서 비밀리에 송금되어온 의연금 등만으로는 독립운동을 제대로 추진할수 없다고 판단,「대한민국」명의의 공채(公債)를 발행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는 기발한 착상을 했다.
이승만은 9월1일부터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만들어진 공채표(公債票)를 발매했다. 공채표는 10,25,50,1백,5백달러 등 5種이었고 연리(年利)6%에 미국이 한국정부를 승인한 1년뒤에상환(償還)한다는 조건부였다.
위원부는 미주와 하와이는 물론 멕시코.쿠바.칠레.캐나다 등지에 있는 교포와 화교(華僑)들에게 공채표를 팔아 1921년까지무려 8만5천8백55달러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금액은(1921년 기준)위원부 총수입의 약65%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해외 독립운동단체가 갹금한 독립운동자금 중 최고액이었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구미위원부는 어떠한 일을 했는가.우선 상해임정에 매달 1천달러 이상의 자금을 송금해 임정의 명맥을 보존하는데 일조(一助)했다.
이와 비슷한 액수의 돈을 서재필과 황기환(黃玘煥)에게 보내 그들이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각각 발간하는 영문 및 불문 월간잡지『한국평론』과『자유한국』,그리고 다른 많은 독립운동 관련 저서.팸플릿 출판을 지원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내 21개 도시와 런던.파리 등 유럽의 주요도시에 「한인친우회」를 조직, 그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2만5천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미국인 헐버트교수와 벡목사 등 위원부의 「선전원」은 이들 도시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구미위원부가 치중한 사업중 하나는 미국의회 의원들에게 접근,상하 양원에서 한국 독립문제를 토의케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19년 후반부터 미국의회에서 한국문제가 심심찮게거론되었다. 급기야 1920년3월17일에는 상원(上院)본회의에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한국독립승인안이 상정되어 표결에 부쳐졌는데 아일랜드案은 38대 36으로 가결되었지 만 한국안은 애석하게도 34대 46으로 부결되었다.
구미위원부가 추진한 최종. 최대의 사업은 1921년11월부터 1922년2월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군축회의(일명「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구미위원부는 상해임정.국내 각종단체및 뉴욕 유학생단체(공동회)등의 후원으로 이 회의에 이승만.서재필.정한경.돌프.토머스로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한국대표에게 발언권을 주거나 본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구했다.
***끈질긴 설득 실패 그러나 회의 주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일본등 제국주의 열강이 이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이승만 등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워싱턴 군축회의의 폐막을 고비로 서재필은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본업인 의업(醫業)으로 복귀했다. 이에 앞서 1920년10월 워싱턴을 등지고 상해로 떠난 김규식은 1922년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 「극동노력자회의」에 참석,미국등「흡혈귀」국가들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거푸 고배(苦杯)를 마신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축소,정리한 다음 하와이로 돌아가 후일을 기약했다.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그는 나름의 독립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9.歐美위원부 발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