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18. 이승만의 上海방문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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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60회 작성일 18-06-10 19:55본문
이승만(李承晩)박사는 약 6년간(1919~1925)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상해에서 집무한 기간은 6개월(1920년12월~1921년5월)에 불과했다. 그가 어떻게 상해를 왕복했는지의 전말은 아직 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다. 다행히 이화장(梨花莊)에는 李박사 자신이남긴 상해 방문기록이 있다. 이 미공개 자료를 근거로 그의 상해방문 과정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1920년 여름 워싱턴에 있을 때 상해방문을 결심했다.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상해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은 1920년 여름 워싱턴에 있을 때 상해방문을 결심했다.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상해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일제(日帝)가 자기 머리에 3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납치 또는 암살을 기도하고 있었고 미국이나 중국정부가 그에게 여권과비자를 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결국 이승만은 불법 밀항(密航)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승만이 상해밀항을 준비하기 위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6월29일, 그 후 10월에 그는 워싱턴에 있던 자기의 비서 임병직(林炳稷)과 상해임시정부의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및 군무총장노백린(盧伯麟)등을 호놀룰루로 불러모아 다 함께 상해로 떠날 궁리를 했다. 그러나 네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위험천만이라고 판단한 이승만은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임병직만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호놀룰루市에서 장의사(葬儀社)를 경영하는 유지(有志) 보스윅의 집에 따로 칩거하면서 보스윅이 적당한 배편을 잡아줄 때까지 기다렸다. 보스윅은 11월16일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상해로 직행하는 운송선 웨스트 히카號의 2등항해사를 매수해 이 두사람을 남몰래 승선시켜 주었다.
중국옷으로 변장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웨스트 히카號의 밑바닥 선창(船倉)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중국인 시체를 담은 관(棺)이 실린,통풍장치가 전혀 없는 철제창고 속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다음 배가 하와이 영해를 벗어난 다음날에 야 갑판위로 나왔다. 뒤늦게 밀항자를 발견한 이 배의 선장은 다행히 그들의 밀항을 눈감아 주었다. 이승만은 20여일간의 지루한 항해를 한시(漢詩) 7수(首)를 지으면서 소일했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12월5일 오전10시 목적지 상해에 도착했다. 선장의 특별배려로 상해부두에 검사없이 상륙한 그들은 인력거를 타고 중국인 거리로 직행, 맹연관(孟淵館)에 투숙했다. 여기서 이승만은 미리 연락해둔 자기의 심복(임시정부 의 정원 의원)장붕(張鵬)에게 편지로 상해도착 사실을 알렸다. 이승만은 이틀 뒤에 나타난 장붕으로부터 현지사정을 브리핑 받고나서 임시정부에 자신의 상해도착 사실을 통보했다.
상해임정측에서는 이승만을 상해의 「벌링턴호텔」로 옮겨 모셨다. 그러나 여기서도 신변의 불안을 느낀 이승만은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租界)내 徐家匯路 3번지에 위치한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푸트목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12일부터 1921년 5월28일까지 줄곧 크로푸트 목사집에서 기거했다.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서 임정 청사를 방문해 직원들을 접견한것은 12월13일. 그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월28일 상해교민단이 베푼 환영회에서였다.
그는 1921년 1월1일 신년축하식을 계기로 임시대통령의 공무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에게 대정략(大政略)과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資金)을 기대했던 상해 임정의 정객들은 그에게서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적이 실망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3.1운동 발발전후에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委任統治)아래 둘 것을 청원했던 사실 등을 들추어내어 그를 비난.공격했다.사 면초가(四面楚歌)에 처한 이승만은 시종 수동적 자세로 정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급기야 이동휘.안창호.김규식.남형우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임정을 이탈하자 이승만은 신규식.이동녕.이시영.노백린.손정도 등으로 새 국무원을 구성해 간신히 위기국면을 넘겼다. 5월17일 그는『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때문에 부득이 상 해를 떠난다는 고별교서를 임시의정원에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상해를 떠날 때도 이승만은 불법적 방법으로 배표를 구입하고 몰래 승선해야 하는 과정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하와이까지의 배표는 상해에 있는 친한(親韓)미국인 선교사 피치박사가 구득해주었다. 이승만은 일본인 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5월 19일 상해 근처의 우쑹(吳淞)항으로 떠났다가 닷새후에 다시 크로푸트 목사댁으로 돌아와 쑤저우(蘇州)를 관광하며 5월28일까지 쉬었다.
그가 탑승한 마닐라行 기선 콜럼비아號가 상해항을 출항한 것은5월29일 오전 5시.이승만이 천신 만고(千辛萬苦)끝에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은 이로부터 한달뒤인 6월29일 오전8시였다.
상해체류기간중 이승만은 틈을 내 3월5~10일에는 장붕과 함께 난징(南京)을, 3월25~27일에는 크로푸트 부처와 함께 자딩(嘉定)縣 류허(劉河)를, 그리고 5월24~25일에는 크로푸트부처및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쑤저우를 관광했다 .
이승만이 상해밀항을 준비하기 위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은 6월29일, 그 후 10월에 그는 워싱턴에 있던 자기의 비서 임병직(林炳稷)과 상해임시정부의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및 군무총장노백린(盧伯麟)등을 호놀룰루로 불러모아 다 함께 상해로 떠날 궁리를 했다. 그러나 네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위험천만이라고 판단한 이승만은 원래의 계획을 바꾸어 임병직만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호놀룰루市에서 장의사(葬儀社)를 경영하는 유지(有志) 보스윅의 집에 따로 칩거하면서 보스윅이 적당한 배편을 잡아줄 때까지 기다렸다. 보스윅은 11월16일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상해로 직행하는 운송선 웨스트 히카號의 2등항해사를 매수해 이 두사람을 남몰래 승선시켜 주었다.
중국옷으로 변장한 이승만과 임병직은 웨스트 히카號의 밑바닥 선창(船倉)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중국인 시체를 담은 관(棺)이 실린,통풍장치가 전혀 없는 철제창고 속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다음 배가 하와이 영해를 벗어난 다음날에 야 갑판위로 나왔다. 뒤늦게 밀항자를 발견한 이 배의 선장은 다행히 그들의 밀항을 눈감아 주었다. 이승만은 20여일간의 지루한 항해를 한시(漢詩) 7수(首)를 지으면서 소일했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12월5일 오전10시 목적지 상해에 도착했다. 선장의 특별배려로 상해부두에 검사없이 상륙한 그들은 인력거를 타고 중국인 거리로 직행, 맹연관(孟淵館)에 투숙했다. 여기서 이승만은 미리 연락해둔 자기의 심복(임시정부 의 정원 의원)장붕(張鵬)에게 편지로 상해도착 사실을 알렸다. 이승만은 이틀 뒤에 나타난 장붕으로부터 현지사정을 브리핑 받고나서 임시정부에 자신의 상해도착 사실을 통보했다.
상해임정측에서는 이승만을 상해의 「벌링턴호텔」로 옮겨 모셨다. 그러나 여기서도 신변의 불안을 느낀 이승만은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租界)내 徐家匯路 3번지에 위치한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푸트목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12일부터 1921년 5월28일까지 줄곧 크로푸트 목사집에서 기거했다.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서 임정 청사를 방문해 직원들을 접견한것은 12월13일. 그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월28일 상해교민단이 베푼 환영회에서였다.
그는 1921년 1월1일 신년축하식을 계기로 임시대통령의 공무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에게 대정략(大政略)과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資金)을 기대했던 상해 임정의 정객들은 그에게서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적이 실망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3.1운동 발발전후에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委任統治)아래 둘 것을 청원했던 사실 등을 들추어내어 그를 비난.공격했다.사 면초가(四面楚歌)에 처한 이승만은 시종 수동적 자세로 정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급기야 이동휘.안창호.김규식.남형우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임정을 이탈하자 이승만은 신규식.이동녕.이시영.노백린.손정도 등으로 새 국무원을 구성해 간신히 위기국면을 넘겼다. 5월17일 그는『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때문에 부득이 상 해를 떠난다는 고별교서를 임시의정원에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상해를 떠날 때도 이승만은 불법적 방법으로 배표를 구입하고 몰래 승선해야 하는 과정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하와이까지의 배표는 상해에 있는 친한(親韓)미국인 선교사 피치박사가 구득해주었다. 이승만은 일본인 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5월 19일 상해 근처의 우쑹(吳淞)항으로 떠났다가 닷새후에 다시 크로푸트 목사댁으로 돌아와 쑤저우(蘇州)를 관광하며 5월28일까지 쉬었다.
그가 탑승한 마닐라行 기선 콜럼비아號가 상해항을 출항한 것은5월29일 오전 5시.이승만이 천신 만고(千辛萬苦)끝에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은 이로부터 한달뒤인 6월29일 오전8시였다.
상해체류기간중 이승만은 틈을 내 3월5~10일에는 장붕과 함께 난징(南京)을, 3월25~27일에는 크로푸트 부처와 함께 자딩(嘉定)縣 류허(劉河)를, 그리고 5월24~25일에는 크로푸트부처및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쑤저우를 관광했다 .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8.이승만의 上海방문 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