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이해_18편_달래강 제4편 - 외교독립론에 몸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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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021회 작성일 18-05-17 00:52본문
제4편 - 외교독립론에 몸을 바치다.
외교독립론 얘기를 해 보자.
외교독립론은, 외교를 중시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조선의 독립 또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무장투쟁론과 대비된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외교독립론을 현실도피를 위한 핑계라고 비판한다. 그런 사람들은 국내 곳곳에서 레지스탕스가 준동하고, 조선 독립군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국내로 일제히 진격하는 장면을 꿈꾼다.
아니면 적어도 소련과 미국의 정복에 대항했던 아프카니스탄처럼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하여, 일본이 진저리를 치도록 했기를 상상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나는 피사로가 겨우 186명의 군인과 13자루의 소총으로 20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던 잉카제국을 정복했다는 글을 읽고 실소했던 기억이 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그 때 나는 “참, X신같은 놈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나중에 원세개의 병력이 3,000 명 뿐이었다는 글을 읽고나서 잉카와 아즈텍 왕을 비웃었던 게 미안했다. 사돈 남 말 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어릴 때의 일이겠지만, 원세개는 불과 3,000 명의 병력을 가지고 조선의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10년 이상 좌지우지 했다. 20여 세 밖에 안된 놈이 고종 면전에 대고 “너같은 혼왕(혼미한 왕)은 당장 폐위시켜도 시원치 않다”고 협박하고,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조약 서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는 내용을 넣고, “조선은 외교에 대한 일체를 청에 문의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안동김씨 양반 딸들을 첩으로 삼고, 청군으로 하여금 부녀자 강간과 약탈을 자행하게 했다.
2,000만 명의 인구(맞나?)를 가진 국가가 3,000 명을 제압하지 못해 저런 치욕을 당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은 완전하게 오합지졸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은 빨리 개혁개방을 하던지 아니면 빨리 망해야 옳았다.(지금의 북한과 비교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종과 민비를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김옥균, 박영효, 이승만 등 개화파들의 목숨을 건 근대화, 개방화 주장을 100번 지지한다.(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도 청군의 반이 본국으로 돌아간 기회를 노려 감행했다. 베트남에 프랑스가 상륙하자, 베트남을 자기 속방이라고 생각해왔던 청이 프랑스를 혼내 주려고 청군 1,500 명을 베트남으로 빼돌렸기에 감행할 수 있었다. 물론 청은 프랑스에게 개피를 봤다.)
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엄연히 황제도 있던 조선 말에도 이랬는데, 둘 다가 없던 식민지 하에서 독자적인 무력으로 독립을 한다는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조선 병합은 당시 국제열강이 승인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조선병합을 보는 제1원칙은 이것이 국제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국제질서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잊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일제는 1930년대부터는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 행정력으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서 동남아 전체를 석권하고 호주까지 넘보던 강대국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또 민족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무장독립운동은 씨가 마른 상태였다. 조선 사람들은 이미 일제의 충실한 신민이 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국내 민족지도자들은 독립의 희망을 접고 변절한 상태였다. 김구의 임시정부 본거지조차 일본군을 피해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집세를 내지 못해 장개석이 주는 자금에 목줄을 매고 있을 때였다.
피지배국 조선의 국내 치안도 안정하기 그지 없었다.
일제시대 조선에 있던 일본인은 최대 75만명(총인구의 2.7%)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대부분이 도시와 항구에 살았고, 시골 면소재지로 가면 주재소 순사, 소학교 교장과 교사, 수리조합 및 금융조합 직원 등 총 5~6 명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총독부의 지배체제는 강건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조선인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조선인들 중 일제에 대한 자발적 협조자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요 이유는, 적어도 백성들 입장에서는 조선 말의 저 엉망인 시스템보다 일제의 통치 시스템이 더 좋았다는 데 있다. 그만큼 조선 말 나라의 사정은 개판이었다.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독립이란 없었다. 조선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영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해체를 조건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승리하지 못했다면, 스스로 독립을 이룰 나라는 세계적으로 한 나라도 없었다.
제국주의 해체는 인류사에 있어 미국의 절대적 공헌임에는 틀림 없는데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첫째는 당시 세계의 첨단을 가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전근대적 가치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다 중요한 이유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당시의 국제질서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자체가 워낙 땅 덩어리가 크고 경제적으로도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어, 골치 아프게 걸핏하면 저항하는 식미지로부터 원료를 뺏고 상품을 강매하는 시스템보다는 세계를 개방시장으로 하여 자유무역을 하는 편이 미국의 이익에 맞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2차대전 후의 제국주의 해체와 80여 개 독립국의 탄생은 모두 제국주의가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피지배국 독립운동의 힘만으로는 독립한 나라는 없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무슨 우리 힘만으로 무장투쟁을 해서 독립을 쟁취한단 말인가?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공산주의 투쟁을 국제질서 측면에서 보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1941년에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을 임시정부에 강요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통제 하에 두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뒤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거나 한·미를 이간질했다. 해방이 되자 갑자기 김구를 환대하고 막대한 돈도 주었다. 왜 그랬을까? 김구의 임시정부를 꼭두각시처럼 부리거나 아니면 해방된 한국에서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도록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숨은 목적이 있었다. 이게 바로 장개석판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는데 김구가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바르게 대응했을까?
만주 공산주의 혁명 투쟁이나 6·25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에서의 독립군 대량 학살(자유시 참변) 배경에는 만주의 한민족 지도자들을 제거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스탈린의 속셈이 있었다. 모택동이 조선족 공산주의자들과 항복했던 장개석의 국민당군 출신들을 6.25에 대거 투입한 배경에도 골치 아픈 국민당 잔당들과 조선족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모택동의 속셈이 있었다. 물론 장래의 라이벌 중국의 희생을 유도하려는 스탈린의 속셈도 있었다. 마치 2차대전 때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폴란드 ‘카틴 숲 대학살’을 연상케 한다. 이것 역시 스탈린판 또는 모택동판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는데 김일성이 이런 배경을 이해했을까?
나는 김구나 김일성이 이런 국제질서의 음흉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김구의 중국 임시정부도, 김일성의 만주 공산주의 혁명투쟁도, 모두 장개석판, 모택동판, 스탈린판 동아시아 국제질서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김구처럼 공허한 성리학적 명분이나 김일성처럼 개인적 권력욕에 집착하면 이렇게 민족 전체가 크게 당하게 되어 있다. 국제질서를 깰 생각은 못하고 맨날 소총 들고 설쳐봐야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깨알 백 번 굴러봐야 호박 한 번 구르느니만 못한 것이다.
일제 40년간 조선을 지배한 나라는 물론 일제지만, 일제를 지탱하게 한 것은 국제질서였고, 당시 국제질서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였다. 이미 제국들 간의 흥정으로 자기들의 나와바리가 정해진 상태였다. 아시아만 보더라도 조선과 대만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중국은 영국과 포르투갈과 독일과 러시아가,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가 먹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국제질서가 그랬었고 거기에 조선이란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의 티벳이나 신장위그루보다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 국제질서 속에서는, 조선은 그냥 일본의 영토였고 조선 민중은 그냥 일본의 국민이었다. 이 국제질서는 한 두 명의 일제 공무원이 독립군 총에 맞아 죽는다고 깨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제국끼리 전쟁해서 한 쪽이 죽어야만 깨진다. 지배국에 반대편에 서 있는 나라 국민들의 환심을 사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에 붙어 조금이라도 도와줌으로써, 나중에 발언권도 얻고 국제질서의 승인을 받는 것,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최소한 전략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다.
무장투쟁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국제질서를 고려하면서 신축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지금 달라이 라마가 티벳 독립을 위해 오직 무장투쟁만을 한다면, 그것이 티벳 독립이나 티벳 국민들의 행복에 과연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보면 명확해진다.
얘기가 약간 빗나가지만 조선 500년간의 중국에 대한 “책봉과 조공” 역시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였으며, 조선은 그 질서 내에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에 보내는 조선 왕의 문서 끝에는 “신(臣) 김개똥”이란 글자가 들어갔다. 이것을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시의 국제질서가 그랬기 때문이고 그 질서를 준수하는게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미·일 등과 조약을 맺을 때, 문서에 “상국(上國) 청(淸)”이란 말도 적으려고 고집해서 상대국이 난감해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물론 고종의 저런 자세는 당시 쇠퇴하는 청나라와 서세동점 등 급변하던 국제질서를 인식하지 못한 바보 짓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고종을 아주 싫어했다.) 국제질서란 이렇게 무섭고 막강한 것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 이런 국제질서의 본질을 궤뚫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국제정치학박사 이승만이었다. 실제 제국주의 국제질서는 1,2차대전과 국제연맹, 국제연합 등을 거치면서 깨지고 있었고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철벽같은 국제질서에 수십년 동안 부딪혔고,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국제연맹 총회나 군축회담에 가서 홍보하고 설득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친분과 명성을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 선교사, 언론인, 일반인을 상대로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고 글을 썼다. 전승국이 될 미국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전혀 승산이 없는 일제타도 구호인데다가, 근대적 서양화를 급속히 추진하고 있던 일본에 대한 당시 미국인들의 호감을 고려할 때, 그리고 1차대전 승전국인 미·영·프의 동맹국이 일본임을 고려할 때, 이승만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국제질서의 높은 벽을 느꼈고 깊이 좌절하기도 했다.가장 높은 곳에서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 아래 산 속에서 무장투쟁만을 주장하는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닫힌 사고에 빠져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 영토 내에서 무장훈련을 시키는 박용만과 친일파 미국인 D.화이트 스티븐슨을 암살한 장인환 의사를 비판했다.
어느 나라든지 총 들고 들어오는 외국인의 입국을 환영하지 않는다. 동맹국인 일본을 테러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미국에서 무장훈련을 하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겠는가?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무장해제 당하고 모조리 학살당했던 “자유시 참변”도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당시 러·일 관계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러·일 관계 자체가 이미 국제질서의 영역이다.) 국제질서에 무지하면 이렇게 당하는 것이다.
장인환 의사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미국 현직 대통령(T.루즈벨트)의 절친한 친구인 스티븐슨을 총으로 암살한 것을 당시 미국인들이 지지했겠는가? 잘 해봐야 “조선인은 테러를 좋아하는 민족”이란 인상만 심어줄 것이 뻔했다. 실제로 그 다음 해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까지 암살 당하자 미국인들은 조선인들을 테러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하버드대 지도교수는 이승만의 석사학위 논문심사를 거절하여 이승만은 하버드대를 떠나야만 했다.
21세기인 지금도 아랍인들은 테러리스트로 각인되어 있는데, 100년 전이야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승만의 박용만, 장인환 비판은 미국여론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국제질서는 견고했고 냉혹했다. 이승만은 오직 국제질서가 임시정부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해주기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등 어느 나라도 이를 승인하거나 임시정부의 독자적인 군사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임시정부 자체가 이념이나 노선 차이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기에 국제적으로 대표성도 없었다.
이승만이 1939년 8월, 김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모두 국제정세에 무지몽매함을 개탄”한 다음, “중국이 아무리 피를 흘리며 일제와 싸운다고 해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으니, 미국 국민의 동정을 얻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장개석에게 알려 주라”고까지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국제질서에 통찰력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