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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17.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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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18회 작성일 18-06-1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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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박사는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한국 역사상최초의 민주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자천(自薦)이 아니라 타천(他薦)에 의해서였고, 또 미국에 있는 교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동(遠東:중국과 시베리아 )과 한국에 있는 동포들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그에게 처음부터「대통령」이라는칭호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상해임시정부가 그에게「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준 것은 1919년 9월이었는데 그는 그전부터 이미「대한공화국 대통 령」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 어찌된 영문인가.
이승만은 대한제국 말기에 정치범으로 6년간 옥고를 치렀고, 또 윌슨대통령이 총장이었던 프린스턴大에서 국제정치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1910년대 한국 지도자들간에 명성이 가장높았다. 따라서 3.1운동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들이 속속조직. 선포되자 그는 새로 구성된 정부들의 각료(閣僚)명단에 실무수반(首班)으로 거명.부각되었다. 즉 그는 3월21일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가 선포한 소위 노령(露領)임시정부의 내각명단에「국무급 외무총장(국무경) 」으로 추대되었고, 뒤이어 4월11일에 상해에서 발족된 상해임시정부에서는「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그 후 주가가 더욱 올라간 그는 4월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漢城)정부에서「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라는 최고 직위를 부여받았다.

이 무렵 이승만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노령임시정부가 자기를「국무급 외무총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4월5일 현지 신문을 읽고서야 알았다.
상해임시정부가 자기를「국무총리」로 임명한 사실은 4월15일 현순(玄循)의 정보를 통해,그리고 한성정부가「집정관총재」로 임명한 사실은 5월말 워싱턴에 도착한 신흥우(申興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자기를 높이 사준 여러 임시정부들중에 조국의 수도(首都)에서 국민대회라는 적법절차를 거쳐 「정식으로」수립,선포된 한성정부를 정통성있는 정부로 간주했으며, 이 정부가 자기를「집정관총재」로 뽑아준 것을 몹시 고마워했다. 그렇지만 그는 4월23일 워싱턴에 활동본부를 설치하고 자기의 직무를 개시함에 즈음해 모든 임시정부를 영어로『Republic of Korea』라고 부르고 6월부터 자기 자신을『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라고 칭했다. 즉 그는「한성정부 집정관총재」가 아니라「대한공화국(혹은 대한민국:대한민주국)대통령」으로 행세한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측에서는 이승만의 「대통령」직함 사용을 잠칭이라 간주하고 이에 대해 항의한 일이 있지만 이승만이 계속 이를 고집하자 부득이 양보, 9월6일에 개헌(改憲)절차를 거쳐「임시대통령」제를 도입하면서 그의「대통령」직함을 추인해 주었다. 그러면 이승만은「대한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어떤 일을 했는가.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가 신생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미국(특히 하와이)에 있는 한인교포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인교포 상대의 홍보에 신경을 썼다.
이러한 홍보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자가선전용(自家宣傳用)의 우편엽서 내지 리본등을 만들어 교포들로 하여금 이를 활용토록 권장했다. 그리고 호놀룰루의 자기가 발간하는 태평양잡지사를 통해-3.1운동을 주제로 한-『대한독립혈전긔(大韓獨立血 戰記)』라는 책자를 출판(8월15일)하도록 주선하면서 그 책 첫머리에「대한민주국 대통령 이승만」의 사진을 싣고 또「대통령 선언서」(7월4일부)라는 일종의 교서(敎書)를 포함시켜 자기 홍보를 도모했다. 이렇게 한인교포간의 지지기반을 다진 그는 자신의 장점을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독립운동, 즉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 정부와 파리강화회의를 겨냥한 선전.외교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의 명의로 6월14일 美.英.佛.伊등 정부에,그리고 6월27일에는 파리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에게 각각 한국에「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과 자기가 그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6월18일에 그는 일왕(日王) 앞으로 국서를 발송,한 국에 적법적인 「대한공화국」이 수립되었으므로 일본이 새로운 한국정부를 인정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일본군대(외교관을 제외한)와 관리들을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 국서는 이승만의 비서 임병직(林炳稷)을 통해 워싱턴 주재일본대사관에 전달됐다.이승만이 일왕을 상대로 이러한 외교를 벌인 것은 앞서 한국에서 한성정부를 발족시킨 국민대회에서「일본정부에 향하야 對조선통치권의 철거와 군비(軍備)의 철퇴를 요구할사」라는 조항을 대회 결의사항의 하나로 채택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8개월간 美순방 이승만은 7월17일 워싱턴에 「대한공화국」외교업무를 관장할 공사관(얼마후「구미위원부」로 불림)사무실을 확보하고 유급.전문직원들에게 본격적 외교사무를 맡겼다. 그리고 자기자신은 10월초부터 8개월간에 걸쳐 미국의 주요도시를 순방,교포 유지들을 만나 유대를 굳히면서 미국인 교회.YMCA.대학및 상공회의소를 방문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대한공화국」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하는데 피치를 올렸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7.대한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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