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12. 이승만과 하와이의 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832회 작성일 18-06-04 11:37본문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李承晩)박사를 태운 배는 1주일간의 항해 끝에 1913년2월3일 오전8시 하와이 군도(群島)의 하나인 오아후 섬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석달 전에 이곳에 도착해 李박사 맞이 준비를 해온 박용만(朴容萬)이 미리 李 박사를「찬란하게」소개. 선전했기 때문에 수많은 동포들이 부두에 나와 李박사를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출영나온 하객들의 얼굴은 어쩐지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李박사의 부친 경선(敬善)공이 두달전(1912년12월5일) 서울에서 별세했다는 전보(凶報)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잡지 창간 초창기 주필로 筆鋒
이제 사고무친(四顧無親)이 된 李박사는 태평양 한가운데 절해고도(絶海孤島)에 홀로 선 것이다.
이승만이 찾아온 하와이領은 하와이. 마우이. 오아후. 가와이 등 여덟개의 유인도(有人島)로 구성된 군도로 1898년 미국에 병합되었다(사탕수수 재배로 유명한 이 지역에는 1850년대 이래 일본인. 중국인. 포르투갈인. 필리핀인 등 각국 노동자들이 유입돼 원주민. 백인과 더불어 인종적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 1902년12월 대한제국 정부가 이곳으로 이민을 허락한 다음 1905년7월 일제(日帝)의 방해로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2년6개월여 사이에 무려 7천2백26명의 한국인이 사탕수수 농장의노동자로 몰려왔다.
1913년 이승만이 도착했을 무렵 하와이 여러 섬에는 약 6천명의 한국인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당시 美洲전체의 한인동포 수는 9천여명). 그들중에는 사탕수수밭을 떠나 소작농으로 성장한 사람도 있었고 아예 도시로 진출해 행상. 식료잡화상. 채소상. 재봉소. 이발관. 여관업 등 영업을 하는 동포들도 있었다. 당시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노동자의 일급(日給)은 75센트, 월급(月給)으로 따져 18달러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영어를 조금 하는 동포로 미국인 상점에 고용되거나 재판소의 통역이 된 사람은 한달에 30~40달러 혹은 60~70달러를 벌고 있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오아후 섬 푸나이 지역에 교포들이 마련해준 조그마한 집에 입주했다. 우선 그가 시작한 일은 현지 답사였다. 그는 1913년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이따금 현지 사정에 밝은 안현경(安玄卿)을 대동하고-하와이. 마우이. 가와이등 큰 섬들을 답사했다.
이러한 현지 답사여행을 통해 그는 동포들의 생활상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 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장차 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한 지원-특히 재정적 지원-을 약속받으려 했다. 그러면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실현하려 했던 꿈은 무엇인가.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하기로 마음먹은 일은-워싱턴에 있는 서재필(徐載弼)과 협력-전세계를 상대로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함과 동시에 한국인의 독립의욕을 북돋우는 목적으로 영문 (英文)월간잡지를 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문잡지에 대한 현지 한인들의 호응이 미약해 필요한 자금조달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이승만은 1913년9월20일『태평양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라는 한글 월간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그후 1930년말 『태평양주보』로 바뀔 때까지 17년간 간행됐다. 이승만은 이 잡지의 초창기 주필로서 나름대로의건필을 휘두르며 교포들의 가슴속에 기독교 정신과 애국. 독립사상을 고취하려 했다.
다음으로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은 동포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가 하와이에 오기 전(1906년)에호놀룰루에는 이미 미국 감리교선교부에서 경영하는「한인기숙학교」가 있었다. 때마침 이 학교에 분규가 있었기 때문 에 학교의 경영책임자였던 미국인 감리사 와드먼이 교장직을 李박사에게 맡겼다(1913년8월).
이승만은 흔쾌히 교장직을 맡아 1913년9월2일 이 학교 이름을「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고 학제를 개혁해 학생들에게 영어와 성경 등 과목 이외에 한글과 한문 그리고 한국역사를 가르침으로써 2세 동포들의 마음속에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심어주려 했다.
그 다음으로 그가 시도한 일은 한국동포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선교사업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는「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을 맡을때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의 교육책임자 역도 맡았다. 동시에 그는 오아후 섬의 펄 시티를 중심으로 교회 부흥운동의기치를 들었다. 그의 헌신적인 전도노력에 힘입어 오아후 섬 여기저기에서 세례받는 사람의 수가 부쩍 늘고, 교회당이 신축되며, 불화가 있던 교회들이 화합하는 등 한인 기독교계에는 생기가 돌았다.
이승만이 이렇듯 언론. 교육. 선교의 세방면으로 조국광복을 겨냥한 장기적인 포석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막역한 동지 박용만은『국민보』라는 국민회(國民會) 기관지의 주필로서, 그리고 1914년6월 창단된「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의 사령관으로서 이승만과 쌍벽을 이루어 하와이 군도 동포사회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두「영웅」이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서로 아끼고 돕는한 동포사회는 평온했고, 또 李박사의 평판은 한결같이 좋았다.
그러나 1915년5월 국민회 재정문제로 하와이 동포사회에 일대「풍파」가 일어나면서 두「의형제」간의 우정에 금이 가자 동포사회는 양분되고 이승만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12.이승만과 하와이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