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11. 이승만의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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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70회 작성일 18-06-04 11:35본문
1912년 봄 일제의 개신교 박해를 피해 조국을 탈출한 이승만(李承晩)의 마음은 불안했다. 그는 모처럼 외유(外遊)기회를 활용해 국제무대에서 한국기독교회를 살려내는 특별한 공을 세우고 빨리 귀국하든가, 아예 미국에 정착해 독립운동을 벌이든가 둘중 한길을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기로(岐路)에 서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미니애폴리스로 향하는 도중 일본에 들러 열흘동안 머무르면서 재일(在日) 한국 YMCA 총무로 임명된 옥중동지 김정식(金貞植)을 도와 도쿄 한국 YMCA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을 벌였다. 그는 3월말 가마쿠라(鎌倉)에 소집된 한인「학생대회」에서 의장역을 맡아 1주일간 대회를 인도한 끝에 26명의 창립회원으로「학생복음회」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
국제선교대회서 한국독립 호소
그 다음 그는 도쿄 한국 YMCA회관(옛 한국주일공사관 자리)에 마련된 특별집회에 연사로 나서 회관 신축기금 모금을 위한 연설을 해 그 자리에 모인 2백18명의 유학생들로부터 건축기금 1천3백62엔(총경비 3만5천9백50엔)을 거두는 개가를 올렸다. 이승만은 4월10일 감리교 동북아 총책임자인 해리스 감독과 함께 일본을 떠났다.이날 서울의 일본감리교회 목사가 요코하마(橫濱) 부두까지 마중나와 이승만에게 6개월 이내에 귀국할 것과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일정(日政)의 비위를 건드리 는 언사는 삼갈 것을 당부했다. 동행인 해리스 감독도 그에게 일본의 한국통치를 인정하고 이에 적응할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충고로 미루어 그 당시 일제 당국이나 선교사들은 이승만이 6개월 이내에 귀국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승만 자신도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 일행이 목적지 미니애폴리스에 도착한 것은「국제감리교대회」가 개막되 직전이었다. 5월1일 오전10시 막을 올린 이 대회는 29일까지 계속됐다. 4년에 한번 모이는 이 대회의 목적은감리교회의 감독을 선출하고 선교정책을 결의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일부 대표들이-한국감리교회의 독립성을 약화시킬목적으로-한국감리교회를 중국감리교협의회에 통합시키려는「음모」를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 음모를 좌절시키는데 주력했다. 아울러 그는 이 회의에서 한국 의 자주독립이 세계평화에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세계 모든 기독교도가 단결,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서정주『이승만박사전』참고).
이 대회는 이승만의 기대와 달리 한국과 일본에서의 선교사업을 일본의 협조아래 추진한다는 기왕의 정책을 재확인하면서 끝맺었다. 이러한 결론이 그에게 못마땅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승만은 대회기간중 자신이 표출한 반일적(反日的) 언동이 자기의 귀국 가능성을 위태롭게 했음을 자각하고 씁쓸하게 대회장을 떠났다. 미니애폴리스 대회후 이승만은 한국기독교회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고차원의 개인외교에서 찾았다. 즉 그는 프린스턴大 재학때 총장이었던(장로교인) 윌슨 박사를 만나 그에게 한국기독교회에 구원의 손길을 펼쳐줄 것을 호소해 보려고 한 것이다. 당시 윌슨은 뉴저지州 지사로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6월25일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지명획득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윌슨과의 면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승만은 6월5일 학창시절에 사귀었던 윌슨의 둘째딸 제시를 만나 그녀에게 이 일의 주선을 부탁했다. 제시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승만은 6월19일 저녁 뉴저지州 시거트에 있는 주지사 별장에서 윌슨 지사와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은 넉달전 프린스턴大 출판부를 통해 간행된 자신의 저서(박사학위 논문)를 윌슨에게 증정한 다음 용건을 내놓았다.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에 이승만이 윌슨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요청을 했는지는 자료부족으로 분명치않다. 이때 이승만은 윌슨에게 일제로 하여금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즉각 중지하고 폭넓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내용의 성명서에 동의 서명해줄 것을 요청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윌슨은 이승만의 당돌한 요청을 거부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돕고 싶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후 그는 제시의 도움으로 두번(6월3 0일과 7월6일) 더 시거트 별장을 찾아갔으나 허사였다.
윌슨을 통해 한국교회, 특히「1백5인 사건」으로 고생하는 기독교인들을 구제해 보려던 자신의 기도가 실패하자 그는 잠시 뉴욕州 북방 실버베이의 해외선교사 휴양소에서 여름휴가를 즐긴 다음 옥중결의(結義) 동생 박용만(朴容萬)을 만나기 위해 네브래스카州 헤이스팅스로 갔다. 8월14일 이승만이 헤이스팅스 역에 도착했을때 박용만은 자기가 조직. 훈련한 소년병학교 학도 34명을 데리고 나와 거수경례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
닷새동안 헤이스팅스에 머무르면서 이승만은 박용만에게 개인적 고민과 민족적 문제를 터놓고 얘기했다. 그 결과 이 두「형제」가 도달한 결론은 다같이 한국동포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펼치자는 것 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그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귀국 희망을 포기하고 하와이에 장기적「망명」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박용만과 작별한 이승만은 1912년 후반 주로 뉴저지州 캄덴의 YMCA에서 머무르다가 드디어 1913년 1월10일 미국 동부를 떠났다. 기차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1월28일 호놀룰루行 기선 시에라호에 몸을 실었다.
<유영익 한림대교수.한국사>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11.이승만의 방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