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10. 이승만의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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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18-06-04 11:34본문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한마디로 일제가 한국의 기독교 세력을박멸하기 위해「데라우치(寺內)총독 암살미수사건」-즉「1백5인 사건」-을 날조,전국적으로 기독교지도자들을 체포하면서 그 마수를 서울YMCA에까지 뻗쳤기 때문이었다.
소위 1백5인 사건이란 한국을 병탄한 일제가 안창호(安昌浩)선생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1907년 창립)를 뿌리뽑고,나아가 평북 선천(宣川)지역의 개신교 교회와 서울YMCA의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외국과 연계된 한국 개신교세력을 탄압,거세할 목적으로 날조한 사건이었다.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때 서울YMCA의 이승만「학감」은 자기의 맡은 일을 너무 열심히 수행한나머지 이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이 점을 여기서 살펴 보자.
1911년 여름(5~6월)에 그는 서울Y의 브로크먼 협동총무와 함께 한달 이상 전국을 돌아다니며 순회전도를 했다.
이때 그는「기차를 타고 1천4백18마일,배를 타고 5백50마일,말 또는 나귀를 타고 2백65마일,우마차를 타고 50마일,걸어서 7마일,가마 또는 인력거를 타고 2마일」,도합 2천3백마일(3천7백㎞)을 누비면서 13개 선교구역을 방 문하고,33회의 집회에서 7천5백35명의 학생을 만났다.그가 방문한 고을중에는 평안북도 선천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개성에 들러-前독립협회장및 서울YMCA의 부회장-윤치호(尹致昊)가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을방문,그곳에서 개최된「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여했다.이 모임에는 바로 전해 서울에서 열렸던 제1회 하령회때의 참석인원 46명의 두배가 넘는 93명의 학생대표가 전국 21개 미션학교를 대표해 참석했고 뉴욕에서 화이트,인도에서 셔우드등 외국인 강사가 초빙되어 열강(熱講)하는등 대성황을 이루었다.학생대표들은 한국의 기독교 학 생운동의 활성화방안으로서 세계기독학생협의회(WSCF)가맹문제를 열띠게 토의했다.
개성의 하령회를 지켜본 총독부 경찰은 아연 긴장했다.그들은 이 모임의 대회장이 윤치호라는 사실,그리고 이승만이 브로크먼등외국선교사들과 더불어「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모사(謀事)」한 사실을 중시했다.
병탄후 한국인의 모든 정치.사회단체를 강제로 폐쇄하는데 성공한 총독부였지만 YMCA만은 그 국제적 유대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터에 윤치호.이승만 등 명망있는 인사들의 영향으로 학생들간에 Y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서둘러 비상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전택부.『월남 이상재』참조).
1백5인 사건은 총독부 경찰이 1911년11월11일 평북 선천의 신성(信聖)학교 학생 20명과 선생 7명을 검거,서울로 압송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라는 어마어마한 날조 죄목으로 검거된 사람은 7백명이었고 그중 1백23명이 고문 받은 다음 기소되었다.1912년6월28일 열린 첫 공판에서 그중 1백5인이실형을 선고받았다.
한국 개신교계의 거두 윤치호는 1912년2월4일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체포됐다.윤치호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다음 차례가 자기라고 예감하고 운명의 손이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요행히 그는 서울Y의 질렛총무와 한국을 방문한 YMCA국제위원회의 모트총무 개입으로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이들은 미국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상당한 말썽이 빚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때마침 1912년은 제4년 감리교 총회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해였다.이승만을 구제하기 위해 서울에서는 3월9일 감리교회 각지방 평신도 제14기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은 우리나라 감리교 평신도(平信徒)대표로 선출됐다.한국 평신도 대표로 뽑힌 이승만은 그때까지 지녔던 미국 교적(敎籍)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이때 서울(종로)중앙감리교회의 이경직(李景稙)목사가 그의 교적을 미국 매 사추세츠州 케임브리지市에 있는 엡워스 감리교회로부터 자기 교회로 옮겨주었다.이러한 법적 조치가 마무리된 다음 일본에 있는 감리교 동북아(東北亞)책임자 해리스감독이 일본정부에 부탁해 이승만의 여권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던 1912년3월26일은 그가 만 37세가 되는 생일이었다.서울을 떠나기전 그는 창신동 집을 찾아가 중풍으로 몸져 누워있던 75세 고령의 노부에게 눈물로써 작별인사를 했다.이경선옹은 문까지 나와 차마 외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에게 손만 흔들었다.
이것이 사랑하는 아들과의 마지막 만남인줄 알았을까.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이승만의 뇌리에는 일찍이 한성감옥서에서 지었던 한시(漢詩)한 구절이 떠올랐다.
『예부터 그지없다 지사(志士)의 한은 충효를 간직하긴 어려워서라』(從來志士無窮恨 忠孝元難兩得全).
<유영익 한림대.한국사>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0.이승만의 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