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9. 이승만과 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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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61회 작성일 18-06-04 11:29본문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李承晩)박사는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1년5개월간 서울 종로에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1903년 창립)의「학감」으로서 30대 중반 늦청춘의 정열을 불태웠다.
이 기간 그는 안으로는 조혼한 朴씨부인(朴承善)과 이혼하는 불운을 겪으며 밖으로는 일제(日帝)총독부 당국과 예민한 신경전을 벌이면서 YMCA를 중심으로 나라잃은 민족의 기독교화 사업, 즉 음성적인 독립운동에 자기 자신을 몰입시켰다.
귀향한 이승만은 동대문밖 창신동 625-낙산(駱山)중턱의 성벽아래 지장암(地藏菴)옆-에 자리잡은 본가를 찾아들었다. 거기에는 노경(74세)을 헤매는 아버지 경선(敬善)공과 아내 朴씨가 하녀 한명(박간난이)을 거느리고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6년동안 넓고 아름다운 미국 대학캠퍼스와 기숙사, 그리고 별장. 호텔등에서 「화사한」생활에 익숙해진 李박사에게 가족의 가난한 생활상은 너무나 구차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애당초 부인과 금실이 좋지 않았던 터에 막상 비좁은 삶의 공간에서 -외아들 태산(泰山)이 미국에서 객사(1906년)한 다음-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 아버지와 朴씨부인 사이에 끼여들고 보니 그는 문화적 충격에 겹쳐 심각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첫부인과 이별후 기독교화사업 몰두
날로 증폭되는 가정내 불협화음을 견디지 못한 그는 드디어 1910년 겨울 어느날 밤 창신동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이렇게파경(破鏡)한 그는 줄곧 종로 YMCA 건물 3층에 기거하면서 신들린 사람처럼 종교사업에 몰두했다. 마치 내면의 죄책감을 선행으로 보상하려는 듯이….
1910년대의 서울YMCA는 이승만의 옥중동지들과 외국 유학파 개화 지식인이 한데 모인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축소판이었다. 미국인 선교사 질렛 총무와 브로크만 협동총무 아래 몇년 전 이승만의 영향으로 한성감옥 안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상재 (李商在) 김정식(金貞植) 이원긍(李源兢) 유성준(兪星濬) 안국선(安國善) 등 애국지사들이 미국. 일본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기독교 지식인 윤치호(尹致昊) 김규식(金奎植) 김린(金麟) 등과 손잡고 종교부. 교육부. 학생부등의 요직을 도맡아 한국 YM CA운동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엘리트들이 모인 서울 YMCA는 미국. 유럽 및 일본 등 외국의 YMCA와 튼튼한 유대를 가진 국제적 기구로 일제 총독부 아래서 일종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누리는 국내 최강의 항일 독립운동단체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귀국 무렵 한국의 개신교 교인들은 서울 YMCA를 중심으로 기독교 각파 연합사업인「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10월에 종로 YMCA 건물 안에서는 대 전도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도집회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돌아온 그는 이 역사적 부흥운동의 물결을 타고 자신의 포부를 펼쳐나갔다.
서울 YMCA 내에서의 이승만의 직함은 영어로는「Chief Korean Secretary」(한국인 총무), 한국인들의 표현으로는 YMCA학교 학감(學監)이었다. 그의 직위는 서울 Y의 미국인 총무 질렛과 동격이었으며 한국인 간부중에서는 최고위의 자리였다. 실제로 그가 맡은 일은 서울 Y의 학생부와 종교부 사업을 총괄하는 것이었다. 서울 YMCA학교 「학감」으로서 이승만이 펼친 구체적 일은 교회 설교, 성경연구반(바이블 클래스) 인도, 강의와 강연, 전국적 YMCA망 구축, 번역사업 등이었다.
『나는 안식일 때마다 바깥 교회에 나가서 설교하는 일과 오후의 바이블 클래스 지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한편으로 나는 청년회 학교에서 주 9~12시간의 강의를 합니다. 다른 학교에 나가서 수시로 하는 짧은 강의 외에도 청년회 학교 생도들만을 위한 주3회의 특강을 해야합니다』라고 그는 1911년2월13일자 YMCA 국제위원회 앞 보고서에 자신의 활동을 요약했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첫주일(10월16일)에 5백70명이 모인 학생집회에서 전도강연을 했으며 이 모임에서 성경연구반 회원 1백43명을 획득했다. 그후 그는 매주 오후 성경연구반을 인도했으며, 매회 평균 1백89명의 학생을 만났다. 성경연구반은 이승만이 YMCA사업으로 도입, 정착시킨 그의 역점사업의 하나였다.
그는 서울 YMCA 학교에서 성경과「만국공법」(국제법)을 가르쳤다. 이때 이승만의「명강」을 들었던 학생 중에는 훗날 외무부 장관이된 임병직(林炳稷), 공화당 의장 정구영(鄭求瑛), 과도정부 수반 허정(許政), 한미협회 회장 이원순(李元淳)등 명사가 포함된다.
경향(京鄕) 각지에 산재한 미션계 학교에 YMCA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도 이「학감」의 일이었다. 그는 언더우드가 창설한 경신(儆新)학교등 서울에 있는 여러 학교안에 YMCA를 조직하고 토요일마다 서울 YMCA 학생회 주최로 시내 5개 학생Y의 연합토론회를 열었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으로 그는 1911년 초여름과 가을에 전국순회 전도여행을 하면서 미션학교들을 돌아보고 지방 YMCA를 조직했는데 이때 그는 일제에 짓밟혀 신음하는 민족의 참상을 직접목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짬을 내 YMCA 국제위원회 총무 모트박사가 저술한 『신입학생 인도』(Work for New Students)라는 책자를 번역, 이를 1911년 10월에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미국유학시절에 꿈꾸었던 번역사업의 첫 열매였다
<유영익 한림大.한국사>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9.이승만과 Y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