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승만의 環鄕 > Study

본문 바로가기

Study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8. 이승만의 環鄕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70회 작성일 18-06-04 11:23

본문

이승만(李承晩)박사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할 무렵 대한제국은 일제(日帝)에 병탄되는 과정에 있었다.

세계적인 명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나 그에게는 돌아갈 조국이 없었다. 민영환(閔泳煥). 한규설(韓圭卨)등 그를 아껴주던 조선정부 위정자들이 자결하거나 거세당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공부한 국제법을 당장 활용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부친과 본부인)이 학수고대(鶴首苦待)하는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은어떠했을까.

하버드大 재학시절부터 이승만은 졸업후의 진로문제에 대해 서울에 있는 게일. 언더우드등 선교사들에게 간간이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에게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고 강조하면서 반드시 귀국해 같이 일하자고 권했다. 게일은 이승만이 귀국해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 YMCA)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한 반면, 언더우드는 자신이 창립을 계획하고 있는 대학, 즉 경신(儆新)학교(연세대학교 전신) 대학부의 교수로 취임해 주기를 바랐다. 

이승만은 프린스턴大에서의 마지막 학기인 1910년 3월말 뉴욕에 있는 YMCA국제위원회를 찾아가 그곳 책임자들과 자신의 취업문제를 의논했다. 이때 그들은 이승만이 귀국해 서울 YMCA에서 일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언더우드가 설립하려고 하는 대학의 교수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4월13일 언더우드 앞으로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은「자유로운」하와이에도 자기가 일할 곳은 있지만 귀국해 한국국민을 상대로 기독교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한국인들에게 서양문명의 온갖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한 것임을 깨우쳐 주는 설교를 하며, 미국대학에서 전공한 정치학에 관련된 과목들, 예컨대 국제법. 서양사및 미국사를 가르치며, 이러한 학문및 종교에 관련된 책들을 번역 내지 저술하고 싶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이어 그는 이와같은 종교. 교육사업을 통해 반일(反日)운동 혹은 혁명을 선동할 의도는 없지만 이를 일제 통감부가 어떻게 봐줄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일거일동에 대한 일제당국의 감시 태도야 말로 가장 우려되는 점이라고 토로했다.

YMCA에서 일자리를 잡는 경우 자기의 비타협적 성격 때문에 일본인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할 터이므로 차라리 YMCA보다 덜 가시적인 직장-예컨대 교수직-에서 일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또한 그는 YMCA의 간부 혹은 대학교수로 일하는 대신 부흥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백성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칠 각오도 서 있다고 덧붙였다.

언더우드 박사는 원래의 대학창립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인지 이 편지에 대한 답을 빨리 하지 않았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서울 YMCA측은 5월23일자로 이승만에게 취업 초청장을 보냈다. 질렛총무의 이름으로 작성된 이 초청장에서 서울YMCA측은 이승만을 1년간 황성기독교청년회의「한국인 총무」로 고용하되 월급은 1백50엔(75달러), 즉 연봉(年俸)으로는 9백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질렛은 이승만의 취업문제로 서울에 있는 일본 부통감(副統監:曾根荒助)을 만나 상의했는데 부통감이 이승만의 YMCA직 취임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하면서 자기와 부통감은 서로 잘 아는 사이기 때문에 귀국후 이승만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질렛총무가 이승만에게 제시한 봉급수준은 그 당시 한국에서 일하던 구미(歐美)선교사들의 평균연봉이 6백~8백달러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종교인으로서는 상당한 고봉(高俸)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서울에서 근무하는 미국공사(公使)의 연봉이 3천달러였던 점을 감안할 때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들의 보수수준에 견주어서는 박봉이었다.

서울YMCA로부터 최종 제의를 받은 이승만은 프린스턴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날(7월19일) 취업수락의 편지를 썼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받을 봉급에서 1백80달러를 미리 떼어내 귀국에 필요한 선표와 기차표를 구입하고 프린스턴 신학 대학 학사에있는 짐을 꾸렸다. 이승만의 짐은 대부분이 책이었는데 그 짐속에는 오랫동안 애용하던 타이프 라이터와 자전거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들었던 미국땅을 떠나기 전(8월)에 그는 네브래스카州 해스팅스에 있는 옥중동지 박용만(朴容萬)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드디어 1910년9월3일, 즉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된지 나흘후 그는 뉴욕항구에서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기선 발틱호에 몸을 실었다. 1주일간의 항해끝에 영국에 도착한 그는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등 유럽의 대도시를 잠깐씩 둘러 본 다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통과했다. 만주땅을 거쳐 압록강 다리를 넘을 때 그는 일본경찰의 까다로운 입국검사를 받으면서 비로소 망국민의 설움을 체감했다. 그를 실은 기차는 드디어 10월10일 오후8시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도미(渡美)한지 만 5년11개월6일만에, 그리고 뉴욕을 출발한지 1개월7일만에 이승만은 꿈에도 잊지못하던 고향에 도착한 것이다.

미국에서 이룩한 빛나는 형설(螢雪)의 공에 비해 그의 환향(還鄕)은 너무나 쓸쓸했다.
<유영익교수 한림대.한국사>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8.이승만의 環鄕

 



copyrightⓒ Miracle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