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6. 이승만의 유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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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930회 작성일 18-06-04 11:11본문
李박사는 세계적 명문인 하버드大와 프린스턴大 대학원에서 2년반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대학에서 2년 남짓한 기간에 인문. 사회과학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쾌거였음은 물론 미국의 대학교육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먼저 많은 유학생을 서양에 파견했지만 그들 중 李박사의 학력에 필적(匹敵)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이승만(李承晩)의 미국 유학경력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조지워싱턴大 학부에서 성적이 우수하지 못했던「외국학생」이승만이 무슨 수로 하버드大와 프린스턴大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느냐와 그가 언제 하버드大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느냐다.
우선 이승만이 하버드大 대학원에 입학한 비결부터 파헤쳐 보자. 그는 조지 워싱턴大에서 4학기를 마친 1906년 겨울, 자기의 옛 은사 서재필(徐載弼)에게 편지로 하버드大 대학원에 진학할 의사를 밝히고 조언을 구했다. 서재필은 하버드大에 진학하려는 그의 꿈을 칭찬하고 하버드大에서 역사학을 전공할 것과 1년이내에 석사과정을 끝내고 귀국할 것을 충고했다. 서재필은 박사학위까지 취득할 필요는 없다고 못박았다. 이러한 회답을 받은 이승만은 스승의 충고를 선별적으로 수용했다.
즉 그는 1907년 초 하버드大 인문대학원 원장 앞으로 보낸 입학요청서에서, 자기는 다년간 동양적 학문에 공업을 쌓은 인물이며 한국에서 할 일이 많고 또 자기의 귀국을 고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하버드大에서 2년이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싶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조지 워싱턴大에서는 2년이내에 박사학위 취득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조건부 입학지원서를 접수한 하버드大측은 당황했다. 이유인즉 본국 학생 중에도 인문학 분야에서 2년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례가 없기 때문이었다(통상적으로 4년이상의 시간이 소요됨). 하버드大측은 결국 이승만에게 시한부 조건없이 박사과정에 입학하되 일단 들어와 석사과정부터 차근차근 밟으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불만족스럽지만 장차 조국에 돌아가「서양문명을 도입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하버드大와 같은 명문대학의 학위가필요하다」는 판단아래 이 입학조건을 받아들였다.
1907년 가을부터 1908년 봄까지 보스턴 근처 케임브리지市에 있는 하버드大에서의 학창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이 대학의 「세속적」인 지적 분위기가 전도열에 불타고 있던「종교적」인 그에게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는 역사학 4과목(B.B.B.C), 정치학 2과목(B.B), 그리고 경제학 1과목(D)을 택해 1년 안에 석사학위를 끝내면서 곧 바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려 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낙제점(D), 그리고 역사학 과목 하나에서 C학점을 받음으로써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승만이 이 학교를 떠난후(1909) 하버드大 대학원은 그에게 미국사 한과목을 추가로 이수,「B」이상 성적을 받으면 석사학위 를 주겠다고 배려해 주었다. 이승만은 하계대학에서 이 과목의 B학점을 따냄으로써 드디어 1910년(즉,프린스턴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해) 2월23일에 하버드大의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하버드大에서 1년간 고전(苦戰)했지만 2년안에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1908년 겨울 뉴욕으로 가서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머무르면서 콜럼비아大 박사과정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요행히 그는 여기서 몇해전 서울에서 사귀었던 선교사 홀(E F Hall)을 만나게 되어 그와 함께 프린스턴大를 방문, 대학원장 웨스트(A F West)박사를 면접했다. 면접후 웨스트 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다시 2년안에 박사학위를 끝내야 되겠다고 강조했다. 만약 프린스턴大측이 이 점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면 자기는 차라리 뉴욕에 머무르면서 조건이 더 유리한 콜럼비아大에 입학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드디어 프린스턴大측은 이승만에게 2년 안에 박사과정을 끝내 주겠다는 보장아래 그를 입학시켜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프린스턴 신학교의 특별학생으로 받아주어 신학교 학사에서 무료로 기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만학도(만33~35세) 이승만이 뉴저지州의 아름다운 프린스턴大캠퍼스에서 공부한 기간은 1908년 9월부터 1910년 6월14일까지 2년 미만이다. 이때 그는 신학교 학장 어드먼, 대학원 원장 웨스트, 그리고 대학교 총장 윌슨등의 총애를 받으면서 비교적 즐거운 학구생활을 영위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과목을 청강하면서 프린스턴大 대학원에선 국제법을 전공하고 미국역사와 철학사 를 부전공으로 택했다. 마지막 학기에 그는 엘리엇 교수의 지도아래『미국의 영향을 받은「국제법상의」중립』이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을 썼 다. 그의 학위논문은 심사위원 3명으로부터「우수」평점을 부여받았으며 졸업후 1912년 1월 프린스턴大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승만은 1910년 7월18일의 졸업식에서-나중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된-윌슨총장으로부터 손수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승만은 서양사(특히 미국사). 정치학. 철학 등을 폭넓게 배운 기초위에 국제법을 전공한, 말하자면 한국 최초의 국제정치학자였다. 19세기 중엽이래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받아온 우리민족은 드디어 당당한 만국공법(萬國公法)의 대가(大家)를 배출한 셈이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6.이승만의 유학(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