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5. 이승만의 유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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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2,390회 작성일 18-06-04 11:09본문
개화기(開化期)에 미국유학을 했던 한국 지식인은 모두 합쳐 70명 미만이다.
그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유길준(兪吉濬).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김규식(金奎植). 신흥우(申興雨) 등이다. 이승만은 이들 선구자보다 뒤늦게 도미, 유학했지만 발군(拔群)의 학력을 쌓았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좀 더 유명한 대학을 다녔고, 또 최초로 철학박사학위를 따냈기 때문에 군계일학(群鷄一鶴)격이 되었다.
이승만은 1905년초 부터 1910년 중반까지 약 5년6개월 동안 미국에서 세군데의 대학을 다녔다. 제일 먼저 다닌 대학이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大였다. 이 대학은 세계정치의 중심지인 미국 수도(首都)의 한복판, 특히 백악관(白堊館) 바로 옆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정치지망생에게는 인기높은 대학이었다. 이 대학에서 2년6개월동안 공부함으로써 그는 미국정치의 내막을 훤히 파악할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이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가.
1904년 말 이승만이 조국을 떠날 때 그의 흉중에는 밀사의 사명 이외에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으려는 야심이 숨겨져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는 게일과 언더우드등 서울의 저명한 미국선교사들로 부터 미국 교계(敎界) 지도자들 앞으로의 추천서를 두둑히 챙겨두었다. 추천서에서 이 선교사들은「정치범」이승만이「7년간」감옥생활을 하면서 40여명의 동료 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실을 강조하고 그가 장차 한국 기독교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을 예언하면서 그에게 2 ~3년간의 교육「완성」기회를 베풀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이승만은 이 추천장들을 들고 워싱턴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코베넌트 장로교회(The Covenant Presbyterian Church)의햄린 목사를 찾아가 유학지도를 부탁했다. 햄린목사는 이승만- 그당시 주미 한국공사관의 법률고문이었던-을 조지 워싱턴 대학의 총장 니덤에게 소개했다. 니덤총장은 그를 조지 워싱턴 대학의「특별생」으로 받아주되 배재학당(당시의 영어명칭:『Pai Jai College』)의 학력을 감안하여 학부(學部)의 2학년으로 편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이 장차 교역자(敎役者)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그에게 등록금 면제의「목회장학금」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승만은 1905년 2월부터 1907년 6월까지 2년6개월동안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창생활을 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만30~32세. 만학도(晩學徒) 이승만이 여기서 무슨 과목을 택하였고 또 그의 성적은 어떠했던가. 첫해에 그는 영어( F.C.D), 경제학(E), 역사(B), 철학(E)등 총 여섯과목을 택하였다. 둘째-셋째해에 그는 영어(D.B), 역사(C.A), 수학(E.D), 철학(B), 구약학(B.C)등 총 아홉과목을 택했다. 첫해의 성적은 아주 불량했고, 둘째 해 부터의 평균성적은 「C」였다.
그 당시 조지 워싱턴 대학의 「C」는 점수로 환산할 때 80~89점을 의미했음으로 이 「C」는 오늘날 한국대학에서의 「B」에 맞먹는다. 그리고 「E」는 낙제,「F」는 결시(缺試)를 의미했다. 이승만은 대체로 역사. 철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는 좋은 성적을 보인 반면 수학. 경제학 등 계량- 분석적 학문분야에서는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영어성적은 미국학생들에 비해 결코 뛰어나지 못했다. 교역자가 되기 위해 그는 구약학(S emitics)과목을 둘 택했다.
전체적으로 이승만의 미국 대학 성적은 그리 우수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그는 1905년 첫학기에 불원천리 아버지를 찾아온 외아들 태산(泰山)이 이듬해 2월 갑자기 병사(病死)하는 바람에 엄청난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또 헤이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 등 미국의 정치가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그의 학교공부를 저해하는 핵심적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학교 공부보다는 미국인 교회와 YMCA를 찾아다니며 한국의 독립과 선교사업에 대한 강연과 설교를 하는데 더 열중했다. 조지 워싱턴 대학 재학중에 무려 60회(월평균 2회)의 이러한 강연-설교를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학교 공부를 등한시한 주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활동의 연장으로 그는 1906년 7월에 매사추세츠州의 노스필드에서 개최된「만국(기독)학도공회」의 유일한 한국인총대(總代)로 참가하였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 사는 감리교인 독지가 보이드 여사의 배려로 매 여름 뉴저지주州 오시언 그로브에 있는 그녀의 별장에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수 있었다. 이 별장에 머무를때 이승만은 옆 별장에 있는 에델 보이어양과 대서양을 바라보는 해변에서 산책을 즐기기도 하였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5.이승만의 留學1.조지워싱턴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