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외교독립론_9편_김학은 교수 9편 -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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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690회 작성일 18-06-01 23:19본문
선전과 외교로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칭호가 President였다
아무도 그에게 임시정부의 조직과 대통령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신뢰하는 소수의 제자만으로 구성한 임시정부를 마침내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다시 말하면 그의 임시정부는 그 정당성과 합법성을 국내에서 인정받기 전에 국외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올라
미국에는 이미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드 바레라에게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드 바레라는 이런 요구를 묵살했다.그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일랜드 고유 언어로 표시하는 Priomh Aire와 영어의 President의 차이가 가져오는 효과를 인지하고 있었다. 혹자는 드 바레라가 President of the Ministry의 President만을 교묘하게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드 바레라는 분명하게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Ireland라고 자신을 밝혔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는 국무경,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집정관 총재가 마음에 들었다.그는 즉시 이 칭호를 영어로 President로 번역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이승만은 즉시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대통령 집무실을 마련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대한독립혈전기>를 발간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사진을 싣고 대통령 선언서를 담아 해외 동포들에게 자신과 신생 공화국을 선전했다.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는 엽서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예전에 농사의 절기를 담은 책력을 배포하며 왕의 권위를 천하에 알리는 방식이다. 내부를 다진 이승만은 외부로 눈을 돌려 세계 열강 지도자들에게 대한공화국의 정부 수립과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했음을 알리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일본 국왕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번역 사용하면서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집정관 총재를 영어로 번역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겸하여 세 임시정부를 통합할 필요도 생겼다. 이에 상해에서 통합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정부 수반을 대통령으로 수정했다. 1919년 9월 11일 이승만은 국무총리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국에 최초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집정관은 로마 시대의 유산이다.영어로 Regent이다. 지금도 이 직함을 사용하는 공화국이 한 군데 있다. 산마리노다. 이 나라의 수반은 임기 1년의 Captains Regent이다. 두 명이다. 6개월씩 교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