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쓴 까닭은? > Study

본문 바로가기

Study

이승만의 외교독립론_9편_김학은 교수 9편 -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쓴 까닭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690회 작성일 18-06-01 23:19

본문

선전과 외교로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칭호가 President였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라하는 곧바로 계엄 상태가 되었다. 프라하 대학 철학교수 마사리크는 가족을 남긴 채 단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파리에 잠시 머물던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회 체코 출신 의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세웠다.그는 이번 세계대전이 300년 만에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는 대통령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9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마음껏 구사하여 세계의 동정을 구하는 외교와 선전 방략을 택했다. 런던에서 그는 강연과 함께 세계대전의 목표와 전후(戰後) 질서에 관한 책자를 출간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윌슨과 독대할 수 있었다. 그를 설득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구상에서 없애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누대로 지배하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한데 묶어 신생 국가로 독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그에게 임시정부의 조직과 대통령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신뢰하는 소수의 제자만으로 구성한 임시정부를 마침내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다시 말하면 그의 임시정부는 그 정당성과 합법성을 국내에서 인정받기 전에 국외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정적(政敵)들은 그가 대통령을 참칭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보여줬다. 그는 말했다. “나와 나의 정부를 인정해라. 나는 기다리겠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겠다면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그가 이처럼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구세주라고 생각하고 그곳만 쳐다보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마사리크는 러시아가 부패했고 자신들의 조국을 독립시켜 줄 능력이 없다고 파악하고 미국에 기대했다. 러시아가 혁명으로 망하자 마사리크의 방략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드 바레라는 아일랜드 독립을 선포한 16명 가운데 하나였다. 모조리 체포되어 전원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드 바레라는 미국 시민이므로 간신히 사형 집행에서 풀려났다.나머지 15명은 처형되었다. 이것이 1916년 아일랜드 부활절 독립선언이다. 아일랜드는 700년 만에 지배자 영국에 대하여 독립을 선포했다.드 바레라는 수상에 선출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Priomh Aire, 즉 아일랜드 하원의장이며 동시에 내각 수반이다.영어로 번역하면 Prime Minister와 President of the Ministry를 합친 것이다. 1918년 그는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미국으로 밀항한다.당시 미국에는 500만 명의 아일랜드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함을 대통령(President)이라고 자칭했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에 올라

미국에는 이미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드 바레라에게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드 바레라는 이런 요구를 묵살했다.그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아일랜드 고유 언어로 표시하는 Priomh Aire와 영어의 President의 차이가 가져오는 효과를 인지하고 있었다. 혹자는 드 바레라가 President of the Ministry의 President만을 교묘하게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드 바레라는 분명하게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Ireland라고 자신을 밝혔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는 국무경,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집정관 총재가 마음에 들었다.그는 즉시 이 칭호를 영어로 President로 번역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이승만은 즉시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대통령 집무실을 마련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대한독립혈전기>를 발간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사진을 싣고 대통령 선언서를 담아 해외 동포들에게 자신과 신생 공화국을 선전했다.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는 엽서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예전에 농사의 절기를 담은 책력을 배포하며 왕의 권위를 천하에 알리는 방식이다. 내부를 다진 이승만은 외부로 눈을 돌려 세계 열강 지도자들에게 대한공화국의 정부 수립과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했음을 알리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일본 국왕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번역 사용하면서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집정관 총재를 영어로 번역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겸하여 세 임시정부를 통합할 필요도 생겼다. 이에 상해에서 통합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정부 수반을 대통령으로 수정했다. 1919년 9월 11일 이승만은 국무총리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국에 최초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집정관은 로마 시대의 유산이다.영어로 Regent이다. 지금도 이 직함을 사용하는 공화국이 한 군데 있다. 산마리노다. 이 나라의 수반은 임기 1년의 Captains Regent이다. 두 명이다. 6개월씩 교대한다.

이것을 구태여 국문으로 번역하자면 ‘집정관 지도자’일 것이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므로 그 칭호가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 독립하겠다고, 알아달라고 세계에 호소할 필요가 없는 2000년 공화국의 역사가 있다. 총재는 일반적으로 President로 번역되므로 집정관 총재를 영어로 번역하면 President Regent 정도일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명칭이다. 이 명칭을 알아달라고 열강에게 소개할 수 없을 것이다. 열강에게 아일랜드의 Priomh를 소개할 수 없었고, Captains Regent로 알릴 수도 없는 것처럼 President Regent 명함을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약소국 외교독립운동 지도자 마사리크, 드 바레라, 이승만 모두 선전과 외교로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칭호가 필요했다. 그것은 President였다. 이 셋 가운데 이승만이 가장 정직하게 번역했다고 생각된다.



copyrightⓒ Miracle of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