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외교독립론_9편_김학은 교수 7편 - ‘한국 독립’ 위해 윌슨 美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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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18-06-01 23:08본문
칸트의 영구평화사상 바탕으로 위임통치론 만들어
윌슨의 이상은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들이 국제법과 통상조약을 준수할 능력을 갖춘 국제연맹 회원의 자격 조건과, 다른 하나는 식민 모국(母國)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절충으로 나온 제안이 국제연맹 하의 위임통치안이다. 식민지 억압의 족쇄를 풀어주되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준비시키자는 취지였다. 이것은 위임통치 지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여 자유통상의 범위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 영구평화 의무조항 3과 그 보장보록의 실천이다.
또 하나의 이점은 국제연맹 규약 제22조는 위임통치 지역에서 일체의 군사시설을 세울 수 없고, 거주민의 모병(募兵)도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칸트 영구평화 금지조항 3의 응용이며 국제분쟁을 피하고자 하는 윌슨의 지략이었다.
이승만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동유럽 식민지 독립에만 적용됨을 알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그는 전쟁 주기설을 믿었다.그러나 그것은 언제 발발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승만이 차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였다.
1919년 3월 3일 이승만-정한경이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청원서에 이것이 분명히 적시되어 있다(영문원본의 정한경 한글번역본).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일흠(이름)으로 각하께 청원하노니 각하도 평화회에서 우리의 자유를 주창하야 평화회에 모인 열강으로 하여곰(하여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 하에서 …장래 완전독립을 보증하시면 아직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 하에 두게 하시옵소서. 이러케(이렇게) 할 지경이면 대한반도는 만국통상지(중립통상지)가 될지라. 이러케 하야… 어느 일국이던지 동아(東亞) 대륙에서 침략정책을 쓰지 못할 것이오 동양평화를 영원히 보전할 것이올시다.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 한인으로 하여곰 이 시대에 다른 나라의 속박을 받게 되면 이로써 세계상 민주정책주의(대의제)가 완전히 발전되지 못할 것이올시다. 각하의 영원평화(영구평화)를 창조하시는 근본 대지(국제연맹)가 모든 발달된 위국적 갈망에 큰 만족을 줄이라 하엿스니(하였으니) 이 대지는 평화회에서 모든 일을 규정하는데 모범이 될 것이라. … 각하께서 잘 주선하야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천부의 자유를 찻게(찾게) 하시며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자기가 원하는 정부(독립정부)를 자기들이 건설하고 그 정부 하에서 살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이 문서는 “여러 만국법률사들의 의향을 참작하여” 정한경이 작성한 내용을 이승만이 국제법에 참조하여 검토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안창호가 대한인 국민회 총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그곳에서 승인하여 정한경에게 동의 공함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배타적 독점통상을 깨야
번역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 세 가지 표현에 칸트 영구평화사상이 요약되어 있다. 칸트 의무조항 1의 대의제, 의무조항 2의 국제연맹, 의무조항 3의 중립통상지가 갖춰져 칸트 영구평화가 실현되려면 한국을 다른 나라의 속박에 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이승만이 칸트 영구평화사상에 가장 근접했음을 나타내는 문서가 이승만-정한경이 작성하고 안창호의 대한인 국민회 행정위원회에서 승인한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다. 그러나 이 문서의 중요성은 여운형의 후원으로 김규식이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위임통치안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김규식의 문서에는 칸트 사상이나 국제법의 기초가 전혀 없고 인도주의로 호소하고 있다. 당시 열강이란 모두 식민지를 갖고 있었는데 식민지의 인도주의 호소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 문서의 또 다른 중요성은 그 안목이 세계의 지성과 일치하였다는 점이다. 케인스는 식민지 재배분에 열중하는 승전국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또 하나의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평화회의 영국 대표직을 사임한 케인스는 자신의 주장을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1년 이내에 1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일본에서는 ‘동경경제신보’에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동아일보에 다음의 사설이 등장했다. “아담 스미스 씨는 자유무역을 학리(學理) 상으로 또 실제상으로 주장하여 동국(同國)의 국제무역에 우이(牛耳)를 집(집)케 하였도다. …그러나 금번 국제연맹 문제가 발생한 후로 국제 상 알력을 생(生)케 하는 장벽을 일제히 철거하고 … 해양의 자유와 무역의 자유도 창도되어 평화의 신낙원을 세간에 건설하려 하였으나 구사상에 심취한 자들이 아직 구각을 탈치 못하였으므로 그 이상은 … 구시대로 퇴화하여 자유의 무역이라 하는 문제도 파리 시가에 장사(葬事)하고 보호무역주의로 각국이 모두 관세의 장벽을 신축하여 무역상 국제경쟁에 우각(牛角)을 상교(相交)하는도다.” 이 사설은 스미스가 자유통상이 곧 평화라는 이론을 설득함(牛耳를 執)을 소개한 다음 그럼에도 케인스가 지적한 대로 파리강화회의는 보호무역으로 역행하여 장차 전쟁(牛角相交)이 염려된다는 내용이다.
케인스는 윌슨의 14개 조항 가운데 두 조항에 주목했다. 첫째, 평화에 동의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협력하는 모든 국가 사이에 모든 경제적 장애의 제거와 동등한 교역조건의 제정(3조). 둘째, 국제연맹의 창설(14조). 케인스는 이 둘을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적용을 예시했다. “국제연맹 하에서 자유무역연맹이 반드시 필요하다. 회원들 사이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내에 자발적인 방법으로 독일, 폴란드,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터키 제국에 속했던 신생 독립국가, 그리고 위임통치 국가(Mandate States)가 참여한다.” 케인스의 자유통상 제안에 위임통치국가까지 포함한 것이 주목된다.
식민지에 대한 배타적 독점통상은 식민 모국 이외에 다른 국가에게 통상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식민 상태에서 독립되거나 위임통치 하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국가의 수가 많을수록 개방적 경쟁적 자유통상으로 모두에게 득이 된다. 그래서 케인스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하여 “민족자결주의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라는 윌슨의 의회 연설을 인용한다. 윌슨과 케인스의 생각의 배경에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있다. 이승만의 생각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