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이해_18편_달래강 제18편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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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36회 작성일 18-05-25 22:13본문
제18편 - 에필로그
이인호 교수는 “우리 현대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 곧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였다. 그것은 시민혁명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주창되었던 러시아 혁명 등에 비견될 만한, 우리 역사상 유일한 혁명이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며, 대한민국의 건국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유일하고도 진정한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인 이승만은(서재필도 박사라고 불렸지만, 실은 의사를 뜻하는 doctor라 그렇게 호칭 되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최초로 근대문명의 본질을 배우고 이해한 사람이다. 이승만은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였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받은 당시 세계 최첨단 지식인이었고, 세계질서와 국제룰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으며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불굴의 신념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을 세웠고, 공산화의 위기를 극복했다.
나라가 망하거나 나라를 새로 세우는 일은 수 백년에 한 번 발생하는 매우 드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자체가 평상시의 환경과 같을 리가 없다. 이런 격변의 환경에서 “나라 만들기”를 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평상시의 법적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법을 뛰어넘은 역사적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 당연하다.
또 새로 만들어지는 나라의 정치원리를 자유민주주의로 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할 것인가, 경제원리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할 것인가 공산주의 계획경제로 할 것인가를 두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도 없다. 오직 리더의 지식과 가치관으로 결정된다. 역시 당연하다.
수 천년간 왕조의 신민으로 살았고, 끝내는 나라마저 빼앗겨 40년간이나 이민족 제국주의의 노예로 살았던 무식한 백성들을 이끌고 나라를 만들어야 했던 리더 이승만은, 그런 새 역사의 여명에서부터 탁월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운명적으로 따라오는 난관을 불굴의 투지와 리더십으로 돌파했다. 유영익 교수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나라는 불과 두 세대만에 정치, 경제, 국방, 문화, 자유, 인권 등 전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에 접근해 있다.(정치는 빼야겠지?) 경제만 보더라도 미·일·독·중과 더불어 경쟁력 있는 종합제조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88올림픽 때 동구인들에게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도록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모든 성취가 막강했던 공산 종주국 소·중의 의도를 격파하고 이룬 것이에 더욱 빛날 수 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신생국들과는 현저하게 다른 우리만의 성취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80여 개 신생국 중 최악의 조건에서도 단연 1등을 했고, 그 바탕에는 이승만이라는 리더가 있었던 것이다.
승만(承晩)이라는 이름은 “늦게 왕위에 오른다(계승한다)”는 뜻이다. 과연 이승만은 73세가 되어서야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개국의 왕 후보답게 젊었을 때부터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의 사전에는 ‘주눅 들다’는 말이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소개드렸지만, 해방 전에는 망국 조선의 이름 없는 망명객인 주제에, 해방 후에는 언제 망할지 모를 정도로 볼품 없는 작은 나라의 대통령인 주제에,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들을 비롯한 수 많은 위인들과 정면대결을 했고, 상당부분은 그들을 굴복시켰다.
서양인이었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조차 이승만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고 평생을 전통적인 한국 여인네처럼 행동해야 했다. 이승만은 시인 서정주 앞에서도 프란체스카에게 “겟 아웃!” 하고 소리를 질러, 여사가 아무 말도 못하고 주춤주춤 눈치보며 물러나게 만들 정도였다.(이걸 카리스마라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승만의 성격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소개한다. 작가 강준식의 분석이다.
“이승만은 백호상이다. 흰 범, 곧 백호는 감춰진 공력이 엄청나므로 산 속에 사는 맹호보다 훨씬 고수다. 그래서 누런 범, 곧 황호상의 김구도 이승만 앞에서는 꼬리를 내려야 했다.
김구 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해 이긴 사람이 없었다. 가령 하와이에서 그와 맞섰던 박용만은 북경에서 암살당했고,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을 보였던 김구는 흉탄에 쓰러졌으며, 한강변 30만 명의 인파로 위협적 세를 보였던 신익희는 대선 직전 급서했고,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조병옥 또한 갑자기 병사했다. 또 216만 표의 위협적 득표를 보였던 조봉암은 대선 후 형사(刑死)의 비운을 당했다. 기이하게도 이들 도전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만인을 제압하는 백호의 힘이었을까?
운세만 센 것이 아니었다. 기도 강해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오금이 저려 옴쭉달싹 못했다고 한다. 카리스마 지도자였다.”
한 나라를 세운 위인들은 예외 없이 카리스마가 넘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거꾸로 보면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는 사람은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은, 당시 우리나라 지도자들 중에서 나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퍼스낼리티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그의 카리스마가 한고조 유방이나 김일성같은 “무식쟁이 카리스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국제질서를 이해하고 예견하고 추진한 “박사 카리스마”였다. 세계인들이 옳다고 믿는 “자유민주자본주의”를 이 땅에 구현한 “자유주의자 카리스마”였다.
그러므로 그는 애초부터 권력과 부를 누리기 위한 후진국형 독재자가 될 수 없었다. 그가 비록 독재는 했지만, 그의 독재는 이 메마르고 척박했던 땅에 “자유민주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착근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독재”였다.
나는 우리가 이승만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이 시리즈 도입부에서 말했다. 우리는 왜 편견을 가지게 된 걸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그 원인도 잠깐 분석을 해 보자.
해방 후, 우리는 오랫동안 “개발독재”, 소위 “선의의 독재” 하에서 살았다. 독재체제는 어쨌든 도덕적 정당성에서 약점이 있었기에, 국사교육에서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인 근현대사를 외면했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는 구한말 이후의 역사를 형식적으로만 기술했다. 하긴 개발독재의 역사적 당위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기도 했고, 또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건드려봐야 밥줄 끊어지게 되므로 역사학자들도 근현대사 연구를 외면했다.
개발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자와 좌빨과 좌빨의 후손들이 혼재된 집단이었다. 그들은 개발독재자들의 약점인 이 역사의 공백에 주목했다. 역사의 블루오션이자 독재자들에 대한 기막힌 공격포인트를 발견했다. 그들은 이 공백을 연구하고 책으로 발간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그 완결편이다.
한편 개발독재 체제에서도 계속된 민주 교육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들이 대학으로, 사회로 진출했다. 새 세대들은 젊은 만큼 정의감이 넘쳤다. 그들이 읽은 블루오션의 역사는 너무나 새롭고 경이로우며 울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전교조나 학원강사나 사이비 시민운동가가 되어, 어린 학생들과 순진한 국민들을 세뇌하고 선동했다.
그들은, 우리의 근현대사는 친일주의자·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역사이며, 아직도 우리나라는 미 제국의 꼭두각시이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어 왔으므로 뒤집어야 한다고 썼다.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일제와 충돌한 사건을 우리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하고, 마적단이 약탈행위 때문에 일제와 싸운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심지어는 이승만·박정희 때문에 조국이 분단되었고 고착되었다고 적반하장의 논리를 폈다.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참담한 인권말살 역사에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다보니, 눈에 띄는 모든 불합리가 이승만, 박정희의 때문이라고 하고,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거나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했던, 4·3사건 주동자와 빨치산 게릴라과 윤이상같은 자들을 찬양하고 기념한다.
북한의 KAL기 폭파와 천안함 폭침을 정권의 선전물이라고 하고, 북한의 저 막장 반인권·반민족 세습정권에도 눈을 감으며, 애들에게 체 게바라 사진을 넣은 유니폼을 입힌다. 한 마디로 레닌이 서구의 정신나간 좌파 지식들을 지칭했던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항할 정통 역사학자들이 없었기에, 이들의 악마적 상술에 우리사회는 오랫동안 속수무책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짝퉁 상품의 천지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한 국민들의 상식과 인식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이를 바로잡으려는 역사학자·경제사학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눈에는 불과 2세대만에 80개국 중 1위를 한 나라가, 이렇게 자유와 인권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 나라가, 60년 전에 비해 이렇게 환경이 깨끗해지고 기대수명이 2배 가까이나 늘은 나라가, 강력한 자주 국방력을 갖춘 나라가, 지니계수가 세계평균보다 훨씬 낮은 나라가, 세계가 경이롭게 바라보는 모델국가로 간주되는 나라가, 가난한 장교들이 주도한 5·16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친일파들이 모두 사라진 나라가, 왜 기회주의자가 승리하고, 친일파가 권력을 이어가고, 부익부 빈익빈이고, 실패한 나라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연구해보니 거의 모두가 거짓이었다. 사실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수치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대부분이 악의적 해석의 결과임이 드러났다. 특히 구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와 그로 인해 인해 쏟아져나온 비밀문건들은 그들의 연구를 튼실하게 받쳐주었다. 탈북자들에 의해 우리의 반쪽인 북한의 실상까지 알려지자 모든 것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소 객관적 진실에 가까이 가게 되었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이승만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이승만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을 했던 것이다.
이제 이 시리즈를 끝내자.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지만 아직도 미완성인 대한민국에 대해 무슨 꿈을 꾸었을까? 아니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2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본 시리즈를 마치겠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
첫째, 1955년 진해 휴양지에서 있었던 이승만과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과의 대화.
“자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 줄 아는가? 나는 늘 하나님께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네.”
“각하, 언제쯤 우리도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 30년 걸릴 걸세. 그 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
(과연 우리는 그 30년을 바쁘게 뛰었고, 1985년 즈음에는 경제성장률, 국제수지, 저물가 등 3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면서, 거시경제 지표에서 세계 1등으로 질주하면서 중산층을 대거 육성함으로써, 몇 년 후 다가 올 민주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둘째는 바로 공산주의와 관련된 그의 말이다.
이승만이 4·19 후 하야성명에서 ”공산주의를 부단히 주의하라”고 국민들에게 주문했었음은 이미 밝혔다.
이승만은, 죽기 전 하와이의 병상에 누워 아들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우리나라 통일이 문제인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통일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