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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이해_18편_달래강 제16편 - 당시 시대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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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57회 작성일 18-05-2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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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편 - 당시 시대상황

나는 이승만이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비판한다. 이런 견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과연 그 때 우리가 처한 시대상황은 어땠을까? 6·25는 제외하더라도, 해방 이후부터 6·25 전까지만이라도 살펴보자. 우선 그 5년간의 사건을 기록한 연표를 보자. (짜집기 자료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 1945년 : 소련군, 북한진주(8.12), 청진 점령(8.16), 원산상륙(8.20), 평양점령(8.22). 여운형, 건준(건국준비위원회) 결성(8.17). 우키시마호 침몰(8.24).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언(9.6). 하지 중장 미 24군단 입국(9.8), 서울 점령 및 남한에 군정 실시(9.9). 경의선 철도 운행 중단(9.11). 소련 정치국, 북한 군정실시 공포(9.16). 한민당 창당(9.16).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10.10). 이승만 귀국(10.16).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설립(10.23). 미 LST편으로 잔류 일본군 철수(10.23~11.12일, 약 5만명). 신의주 반공학생의거(11.23).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 결정(12.28). 송진우 암살(12.30).

○ 1946년 : 공산당,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찬성 결의(1.2). 국방경비대 창설(1.15).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16). 미곡수집령(1.25). 북조선 임시위원회 설립(2.8). 북한 토지개혁(3.5). 함흥·흥남 반공학생의거(3.13).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5.15). 이승만 정읍발언(6.3). 전국 콜레라 만연(6.17). 여운형·김규식, 좌우합작위원회 발족(7.25). 북조선노동당 설립(8.29). 9월총파업(9.23). 대구폭동(10.1). 남조선노동당 설립(12.23).

○ 1947년 :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2.20). 서울 남대문 좌우익 충돌(3.1). 제주 3·1절 발포사건(3.1). 남로당 주도 전국 총파업(3.22). 제주발 일본행 밀항선 침몰(5.20).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5.21). 여운형 암살(7.19). 북조선로동당 제1차당대회(8.28).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반도문제 UN에 상정(9.17). 지청천, 반공 청년단체 대동청년단 결성(9.21). 소련, 미·소 양군 동시 철수 제의(9.26). UN, 토착인구 비례 남북한 총선거 결의(11.14). 장덕수 암살(12.2).

○ 1948년 : UN한국임시위원단 입국 및 북한입경 불가(1.7). 2·7 투쟁(2.7). 조선인민군 창설(2.8). UN, 남한만의 선거 결의(2.26). 김구, 남북협상 제의(3.8). 김구·김규식·조소앙·홍명희 등 7인, 5·10선거 반대 공동성명(3.11). 북·중 비밀군사협정 체결(3.16). 제주 4·3사건(4.3). 평양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4.19).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미·소 주둔군 동시철수 결의 공동성명(4.30). 5·10총선거(5.10). 북한, 남한 송전 중단(5.14). 제헌국회 개원(5.31). 조선노동당 창당(6.30). 건국헌법 공포(7.17). 대한민국 초대 정부기구 확정(8.7). 대한민국 건국(8.15).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이양(8.1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선거(8.25). 미군정, 경찰권 이양(9.3). 육군·해군 발족(9.5). 국회, 반민족행위처벌법 통과(9.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9.9). 여순 반란 사건(10.19). 제3차 UN총회,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결의(12.12).

○ 1949년 : 중국홍군 베이징 점령(1.31), 난징 점령(4.23). 육군 8연대 2명의 대대장 포함 2대대 병력 집단월북(5.4). 6.6반민특위 습격사건(6.6). 국회 프락치 사건(6.21). 및 김구 암살(6.26). 병역제도 징병제로 개정(8.6). 목포 형무소 수감자 350여 명 집단 탈옥(9.14). 미군 철수 시작(9.15). 소련군, 북한 철수계획 발표(9.19). 국회,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9.22). 소련, 원폭실험 성공(9.22). 중화인민공화국 성립(10.1). 공군 창설(10.12). 소장파 의원 40명 + 김구 세력, 미군철수 긴급동의안 제출(10.13). 장개석 대만으로 탈출(12.10). 중국홍군 청도 점령(12.27).

○ 1950년 : 애치슨라인 발표(1.12).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 체결(2.14). 농지개혁법안 통과(3.10).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

저런 연표를 볼 때 그냥 읽으면 안된다. 달랑 한 줄로 쓰여진 사건이라고 해도 상상력을 동원해야 당시의 상황을 눈에 그릴 수 있다. 한 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상상해 봐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보자.

- 우키시마호 침몰(1945.8.24) 사건.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 동포들을 태우고 오던 우키시마호가 화재로 침몰된 사건이다. 한국인 승선자 3,725명 중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 천 명으로 발표되었으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사망자만도 1,000명이 넘었다.(1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승선했고, 최소 5,000명이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다.) 당시 재일한국인은 140만 명이 귀국길에 올랐으며, 그 중 90만 명이 1945년 8월~11월 사이에 들어왔다.
우키시마호가 대표적으로 거론되어서 그렇지, 낡은 귀국선(일명 똑딱선)의 침몰사고는 너무나 흔했던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해난사고만도 10여 건이고 미확인된 사고도 많다. 걸핏하면 세월호같은 사고가 났지만 잘 알려지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위 연표에는 기술하지 않았지만, 1946년에는 수재민이 4만명이나 발생하는 자연재해도 있었다.

- 1946년 10월 대구폭동.

이 사건도 10월 1일 하루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미곡수집령(1.25), 전국 콜레라 만연(6.17), 9월총파업(9.23)과 연결되어 있다. 대구폭동 자체만 보더라도 12월 중순까지 3개월에 걸쳐, 전국 131개 군(郡) 중 절반이나 되는 56개 군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배후에는 조선공산당 세력의 조종이 있었고, 136명의 사망자와 5,000여 명의 검거자가 발생했으며, 계엄령까지 불러들인 대형사건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쌀 ‘자유시장 정책’을 펴자 매점매석과 일본으로의 밀수출이 성행했다. 소매물가는 해방 직전에 비해 30배 이상 올랐다. 당황한 미군정은 일제 말에 있었던 쌀 공출제도를 부활하여 쌀을 강제수매했다. 그러자 농민들은 일제 때보다 못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마침 5월에는 사망률이 무려 60~70%에 달하는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경북에서만 4,000명이, 전국적으로는 11,000명이 죽었다.
미군정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경북지역의 교통을 차단했고, 그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하던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겨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때를 놓칠 좌빨들이 아니었다. 9월 13일에는 경성철도공장에서 3,000 명이, 9월 23일에는 부산철도국에서 7,000 명이, 9월 24일에는 서울철도청에서 15,000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남한의 철도 교통망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9월총파업).

미군정은 경찰관 3,000명을 동원하여 농성 중이던 철도노동자들을 검거하고 서울의 투쟁위원회 본부를 폐쇄시켰지만, 10월 1일 대구에서 1000여 명의 부녀자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파업 노동자 등이 가세하자 시위가 다시 확대되었다. 경찰이 진압을 위해 위협발사하는 과정에서 1명이 유탄에 맞아 죽자, 다음 날 조선공산당은 좌익학생들을 동원해 시체를 들것에 싣고 각 학교를 돌아다니며, 경찰의 총탄에 죽은 학생의 시체라고 선동했다.

흥분한 학생과 시민들은 대구경찰서 등 26개 지서와 파출소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고 경찰관과 행정관리, 우익인사의 집을 습격해 방화하고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병력을 파견해 진압했다. 그러나 폭동은 대구 인근지역으로 번졌고, 12월까지 경북 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서울 등에서 계속됐다. 폭동이 끝난 후에도 각 농촌지역의 좌익분자들은 산악지대로 잠입, 게릴라화됐다.(10월폭동).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 1948년 제주 4·3사건.

이것도 단독사건이 아니고 며칠 만에 끝난 사건도 아니다. 1948.4.3에 시작하여 1954.9.21까지 무려 6년 이상을 끌었고, 사망자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며,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타서 가옥 4만동이 소실되었다. 발단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 때문이었고, 당연히 계엄령도 선포되었다. 나도 젊었을 때, “시체가 거리에서 썪고 개가 뜯어먹었다”는 제주도 출신 소설가(현기영으로 기억한다)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 여순반란사건.

그 뿐만이 아니다.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던 여수의 14연대에서 남로당원들이 ‘경찰 타도, 제주도 출동 반대, 분단정권 거부’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하사관들을 사살하고,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의 관공서와 주요기관을 포함한 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하는 등 완전한 해방구를 만들었다. 경찰 74명, 우익 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의 진압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여순반란사건).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여순반란사건과 맥을 같이 하지만, 군대 내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득실득실하여 숙군작업을 해야 했고, 전국 곳곳의 산악에서는 빨치산이 준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군대 내에는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을까?

미군정은 국군준비대, 건국치안대 등 기존의 사설 군사단체들을 해산시키고, 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국방경비대는 나중에 정부수립 후 한국 육군이 됨.) 간부양성을 목적으로 했기에 대원들을 미국유학도 시켜주는 한편 군사영어학교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도 운영했다. 국방경비대는 주로 항만·미군부대 등 국가 주요시설의 경비와 제주4·3사건 진압 등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진압 임무를 수행하였다
시대가 시대인데다가 미 군정도 한 때 좌우합작을 했었기 때문에, 대원들을 뽑을 때 사상에 관계 없이 마구 뽑았다. 좌빨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해체된 좌익계 사설 군사단체 회원들, 좌익활동으로 경찰에 쫓기던 자들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숨어들었다. 국방경비대가 좌익의 은신처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종횡으로 세력을 키우면서 대원들을 부추기고,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일으킨 사건이 1946년 제1연대 1대대 소요사건이었다. 군 내에 침투한 남로당 요원들이 계급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선동해 일으킨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생도대장 폭행사건, 제2연대 부정사건, 영암 군경 충돌사건 같은 소규모 사건이 일어나더니, 드디어 여순반란사건으로까지 비화됐다.

나중에는 여순반란사건에 호응하는 ‘호응투쟁’이 대구 6연대에서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 부대는 1948년 8월 1차반란사건을 시작으로, 1949년 1월 30일까지 세 차례나 반란과 소요사건을 일으켰다. 1949년 5월에는 육군 8연대에서 두 명의 대대장을 포함한 2개 대대 병력이 집단월북하기도 했고, 전방 여기 저기서 월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는 군대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이 뒤엉켜 있는 개판이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으로 좌빨들이 군대 내에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숙군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1948년 10월부터 1949년 7월까지 진행되어, 전 군(軍)의 약 5%에 달하는 약 5만 명을 숙청했고 이 중 2,000 명 이상을 총살했다.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 또는 제대 당했다. (다 아시다시피 박정희도 이 때 검거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백선엽이 구해줬다.)

좌빨들이 군대에만 있었을 리가 없다. 사회 곳곳에 숨어들어, 때로는 암약하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정부 전복 활동을 했다. 대표적으로 제헌국회의원 중 13명이 검거된 국회프락치 사건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랬었다. 그 때는 대한민국 군인의 5%가 공산주의자였다! 초급장교의 1/3이 공산주의자였다! 물론 일부 무리는 있었겠지만 그 때 숙군작업이 없었다면, 이듬해 발생한 6·25는 보나마나 결말이 뻔했다. 그 때는 군대마저 믿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나만 더 얘기하겠다. 바로 빨치산이다.

빨치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1946년 가을에는 전국노동자평의회가 파업을 했을 때, 제천의 철도 노동자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월악산으로 잠적하여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설도 있고, 제주도의 4·3사건과 더불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은 여순반란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순반란이 진압되자, 살아남은 반군들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면서 유격투쟁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남부군 사령관으로 잘 알려진 이현상의 지휘를 받았다. 한 때 토벌로 인해 세력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지만, 6·25 때 북상하지 못하고 입산한 인민군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세력이 크게 불어났다.
지리산 뿐만 아니라 월악산, 태백산맥 등에서도 오랫동안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었다. 이들은 파출소 등 관공서와 기차, 기간시설 등을 습격하고 국가 전복 활동을 했다. 결국 1953년 1월 9일 이현상이 사살되면서 부대는 괴멸되었지만,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1963년 11월까지도 남한에는 빨치산 활동이 계속되었었다. 그 때는 그런 상황이었다.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로 위기상황의 연속이지 않은가?

40년 동안이나 피식민지 신민(臣民)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이 모여 갑자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었다. 대한민국은 신생아였다. 더구나 태아 때부터 발육이 부진한 지진아였다. 지진아로 태어난 대한민국의 유아시절 환경은, 국제정세는 아예 빼고 국내정세만 보더라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문맹률은 80%가 넘었고, 국민소득은 40달러였고, 물가는 폭등하고, 가뭄과 홍수와 태풍은 덮치고, 굶어죽는 자는 부지기수이고, 전염병은 창궐하고, 전기는 끊기고, 산은 민둥산이고, 길은 황톳길이고, 수 백, 수천 명씩 죽어가는 사고는 일상이고, 암살과 테러가 벌어지고, 정당은 400개에 이르고, 국회는 미군철수를 요구하고, 좌빨들의 파업과 폭동은 계속되고, 빨치산은 날뛰고, 사회와 군대와 국회에는 빨갱이들이 암약하고, 군사력은 형편 없는데 반란까지 일어나고, 공권력은 약하고, 행정체계는 엉망이고, 국민들은 이념적으로 분열되고, 전국 방방곡곡이 부패냄새로 진동하던 상황이었다”고 말이다.
저런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를 하지 못했다고 이승만을 욕할 수 있는가? 저런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있을 수는 있는가?

그런데 이승만은 해냈다. 저 난관을 돌파했다.
위에 열거된 아무 사건이나 골라서,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얼마든지 선거를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 있었는데도, 이승만은 한 번도 국회를 해산하거나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때의 상황을 현재의 상황과 동일시하며 굳이 비난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보”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사악한 사람”이다. 그 외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황장엽은 이승만·박정희를 얘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비상상태에 있을 때 비상대책을 세운 공로, 이것을 독재라고 하면서 자꾸 깎아 내리는 것,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애국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당하게 문제를 평가하지 않는 그런 양심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물에 빠져 죽으러 들어가는 아이를 때려서 끌어 내오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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