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이해_18편_달래강 제2편 - 젊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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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1,140회 작성일 18-05-17 00:33본문
제2편 - 젊은 이승만
이승만은 1875년, 양녕대군의 16대손이자 6대독자로 태어났다.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다시 일어나, 일본군함이 강화도를 포격하고 일본군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과 격전을 했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이듬해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된다.)
부모의 꿈은 이승만을 빨리 과거시험에 합격시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가난한 살림에도 10년을 서당에 다녔고, 나이를 속여 13살 때부터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번번히 낙방했는데 원인은 조정의 부패 때문이었다. 그나마 1894년 유일한 희망이었던 과거제도마저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자 절망한 19세의 이승만은 서당 친구의 권유로 배제학당에 들어가게 된다.
1894년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격변기인 해였다. 고부 민란(1.10), 김옥균 암살(2.22). 동학군 1차봉기(3.21) 및 전주성 점령(4.27), 갑오개혁(6.25). 김홍집 내각 출범(7.15), 10년간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원세개의 중국 귀국(7.18), 청일전쟁(7.25), 동학군 2차봉기(9.3), 홍범14조 제정(12.12) 등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전개된 해였다.
학교에서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용돈을 벌었다. 입학 6개월 만에 초보 영어를 가르치는 조교가 될 정도로 영어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배제학당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그의 사상이 일대 전환을 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와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주로 미국인 선교사, 주시경 등 한글학자, 이충구 등 개화당 청년들, 10년 전의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 등인데, 그들과 어울리면서 이승만은 점차 열혈청년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천부적으로 평등하고 정부를 선택할 권리도 갖는다는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는, 군주제와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아온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내용이었다. 감동을 받은 이승만은 중대결심을 했다. 조상(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가 위패 앞에 엎드려 “시대의 변화에 따르겠다”는 선고식을 하고는 미국인 집으로 가서 상투를 잘랐던 것이다. 개화파 청년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바뀐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도 발간했다. 물론 직접 기자’(記者)를 하기도 했다.(기자라는 단어도 이승만이 최초로 썼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 대가로 요동반도를 빼앗았지만, 이듬해인 1895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간섭으로 다시 돌려주게 되자, 조정에는 친러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런 분위기를 바꾸려고 1895년 10월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러자 전국에서 백성들과 의병이 일어났고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
1895년 11월, 이도철 등의 군인들이 춘생문을 통해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처형 당하자, 이승만은 선교사와 누나 집으로 몸을 피해 다녔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군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에 따라(아관파천) 친러·친미 내각이 들어서자, 이승만도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여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식은 대신들과 주한외교사절들도 참석한 거창한 행사였는데 이승만은 졸업생 대표로서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의 영어연설을 했다.
졸업 후 이승만은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인으로 국민계몽에 나서는 한편 서재필·이상재·남궁억·윤치호같은 개화파들과 결성한 급진적 단체 ‘독립협회’에서 배재학당 학생들과 함께 행동대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가 부산 앞바다 절영도와 진해만을 해군기지로 조차하려고 하자,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러시아의 야욕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와 같은 군중집회를 열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개혁 압력을 넣었다.
1898년 3월, 제1차 ‘만민공동회의’가 열렸을 때 이승만은 총대의원으로서 가두연설과 대정부 투쟁에 앞장섰다. 화가 난 고종이 “군주제 폐지 및 공화제 도입 역적모의” 혐의로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고, 이상재·남궁억 등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밤을 새워가며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석방과 개화파 민영환을 위주로 한 새 내각을 구성하는 유화책을 썼지만, 이승만 등의 과격파는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자 고종은, 왕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을 ‘의회’와 유사하게 운영하겠다며,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에 대한 추천권을 독립협회에 줬고,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으며, 23세의 이승만도 종9품 의관이 되었다.
일본은 이들 개화파 민선 의관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본에 망명했던 친일파 청년들을 이승만에게 접근시켰다. 이승만도 일본의 문명개화에 호감이 있던 때라 그들을 만났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일본은 미·러와 전쟁해서 거대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고대하던 중추원이 열리고 이승만이 “개화파 사면 및 박영효를 중추원 의장에 임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자 고종은 격분했다.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역인 역적이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승만 주장의 배경에 박영효를 중심으로 하는 역적모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1898년 12월 중추원을 해산함과 동시에 독립협회 측 의관들에 대한 체포 지시를 내렸다. 이승만도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몰래 반입한 권총으로 간수들을 위협하여 탈출까지 했었지만, 곧 다시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다.
감옥 내 정치범 중에는 배재 동문인 신흥우를 비롯해 이상재·이원긍·이준·양기탁과 같은 독립협회 동지들이 있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격렬하게 대립했던 박용만도 있었고,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도 있었다. 이승만은 박용만, 유성준과 가까이 지냈다.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한 죄로 이승만은 전근대적이었던 조선 말의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7개월동안 손·발에 족쇄를 채우고 목에 10kg의 나무칼을 쓴 채 앉아서 잤다. 고문 후유증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동료 수감자로 하여금 대신 책장을 넘기게 하여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넣는 버릇은 그 때 고문의 후유증일 것이다. 그렇게 6년 이상의 수감생활을 하면서 유럽사와 영어를 공부했고, 영어사전을 집필했고(중단됨), ‘독립정신’과 ‘옥중잡기’란 책도 썼다.
‘독립정신’은 급변하던 당시 세계정세와 열강들의 속셈을 분석한 다음, 대한제국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토대를 한 미국식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군주제와 신분제를 부정한 대반역적 내용이었다.(다만 위험 회피를 위해 입헌군주제가 적합하다고 결론을 냈지만 이미 그는 공화주의자가 되어있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의 과격한 행동(임오군란, 동학란)이 외국군을 끌어들여 국토를 초토화시켰다”며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비판했고, “노쇠하고 무능하고 사악한 중국(청)이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까지의 12년 동안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켜 조선의 개화를 막았다”고 분개했다. “고립되면 강대국의 침략을 막을 수 없으니 세계와 교류해야 한다.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신학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배우게 해야 한다.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라며 세계화, 근대화, 선진화를 주장했다.
그 때가 1904년이고 그가 29세였음을 감안하면, 그리고 당시 조선의 집단적 지식수준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내용이다. 왕은 갈피를 못 잡고, 국모(國母)는 몇 달이 멀다하고 굿판을 벌이며 국고를 탕진하고, 대신들은 청·러·일·미로 나뉘어 싸움질만 하고, 전국의 양반들은 성리학 원리주의에 빠져 허공을 헤매고, 한 해에도 몇 번씩 민란이 일어나던 구한말에, 이승만은 벌써 공화정을 주장했고 동북아 국제질서를 이해했고 세계화를 주장했다. 그 때 조선이 얼마나 형편 없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같은 해인 1904년,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크렙스트가 조선의 형벌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종로1가 전옥서를 찾았다. 당시 전옥서 책임자는 이 서양인의 몸에 “뿔이 없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장시간 신체검사를 했다. 당시 전옥서 책임자라면 요즘 서울형무소 소장이니 중앙부처 국장급이다. 중앙부처 국장급 고위관료가 서양인의 몸에는 뿔이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그 때였다. 그만큼 조선의 지성과 세계관은 형편 없었다. (그러고보니 조선이 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아니 빨리 망해야 역사의 순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에 젊은 이승만이 저런 글을 쓴 것이다.
이처럼 당시 이승만은 실천적 급진주의자였다. 4·19로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그가 학생들에게 했다는 말, 즉 “불의를 보고 젊은이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희망이 없다”라는 말에는, 젊은 시절 그의 급진적 개혁성향을 고려해볼 때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 말을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 때의 급진적 개혁투쟁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승만의 전기를 쓰고자 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구한말 조선의 사정과 그의 젊은 시절을 길게 얘기한 이유는, 그의 일생을 이끌었던 신념이 그 때의 정치적, 국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번 형성된 가치관을 그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고, 우리는 그 혜택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