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3.이승만의 獄中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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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317회 작성일 18-05-23 22:28본문
이승만(李承晩)박사는 카리스마를 풍기는 정치지도자였다.
그의 카리스마는 오랜기간에 걸친 기독교 신앙생활과 유관했다. 그는 미국 유학때 정치학에 곁들여 신학(神學)공부를 했으며, 귀국후 한동안 서울 YMCA의 학감(學監)직을 맡은 바 있고, 30여년에 걸친 하와이 거주기간 호놀룰루에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창립, 해방때까지 교장 및 교역자역을 담당했었다. 이렇듯 그의생애는 종교와 정치가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었는바, 그의 기독교 신앙은 20대후반 영어(囹圄)상태에서 싹트고 자라났던 것이다.
청년 이승만은 1899년 1월9일 대한제국(大韓帝國)정부에 의해 체포,구금되어 1904년 8월9일까지 5년7개월간 서소문(현재 中央日報社 서편)에 있는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가 투옥된 이유는 매일신문.제국신문 등 자신이 창간한 신문의 논설을 통해 고종(高宗)황제의 수구정권을 신랄히 비판했을 뿐 아니라 독립협회(獨立協會).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총대(總代)로서 극렬한 반정부시위를 조직. 선동했으며, 나아가중추원(中樞院)의관(議官,1898. 11.19~1899.1.1)으로서 일본에 망명중인 급진개혁가 박영효(朴泳孝)를 서울로 불러들여 새로운 혁신내각을 수립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고종황제의 노여움을 산 정치범이었다. 그러나 정작 1899년 7 월11일 재판정에서 내려진 그의 죄목은「탈옥미수」(脫獄未遂)였고 형량은 종신형(終身刑)이었다(얼마후 특사로 10년형으로 감형). 왜냐하면 그는 처음 수감되었을 때감방의 두 동지와 함께 탈옥을 기도했다가 실패한 사실이 있었기때문이다.
이승만의 기독교로의 개종(改宗)은 경무청 감방에서 목에 무거운(10㎏) 형틀을 쓰고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극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어느날 그는「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배재학당 시절 예배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순간 그는 목에 걸려있는 나무칼에 머리를 숙이고「오 하느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이 짤막한 기도야말로 원래 유가(儒家)에서 태어났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강한 영향하에 자라났던 이승만의 오랫동안 미루어왔던「천주학」에의 귀의(歸依)를 의미했다. 이렇게 종교적 중생을 맛본 순간부터 그는 모진 고문과 열악한 조건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안위와 평안, 그리고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후일 그는 자서 전에서「나는 6년여 동안의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 영원히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일단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활력이 솟아났다. 결과적으로 그는 감옥에서 눈부신 전도. 교육. 저술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그는 미국 선교사가 차입해 준 신약성경을 가지고 동료 죄수들과 함께 성경(聖經)공부를 했다. 가끔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심방해 그들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이 성경반을 통해 이승만은 감옥에서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40여명의 양반출신 개혁파 지식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신앙체험담과 새로 터득한 사상을『신학월보』에 기고했다.
그후 그는 감옥서장(監獄署長)을 설득해 옥중학교(獄中學校)를개설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유식한 동료죄수들과 함께 글을 모르는 죄수들과 옥리들에게 한국역사. 한문. 영어. 산학. 지리등을 가르치면서 성경과 찬송가도 아울러 배우게 했다. 그는 그가 읽은 한적(漢籍)중『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을 골라 한글로 번역, 나중(1917)에 하와이에서『청일전기』(淸日戰紀)라는 제목으로출판했다.
옥중에서 이승만이 펼친 사업중 가장 야심적인 것은 영한사전(英韓辭典)의 편찬작업이었다. 미국선교사들은 이승만에게「뉴욕 아웃룩」(New York Outlook)등 영문잡지와 영어대사전. 화영사전(和英辭典:일본어-영어사전)등의 사전을 차입해 주었다. 이 자료들을 철저히 독파하면서 영어실력을 높이던 끝에 그는 드디어 영한사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출옥할 무렵 이 사전 만드는 작업은 전작업량의 3분의1(A~F항)정도가 끝나 있었다. 만약 이 작업이 계획대로 끝났더라면 이 사전은 한국 영어교육사상 빛나는 금자탑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승만이 영한사전 편찬작업을 끝맺지 못한 이유중 하나는 작업도중 러일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그는 곧 사전편찬 일을 중단하고『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6개월만에 탈고했는데, 그가 이처럼 빨리 대저(大著)를 탈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 내용의 일부를 제국신문에 이미 발표한 그의 논설로 채웠기 때문이다. 그는 한가한 날에는 시를 짓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의 옥중 한시(漢詩)들을 모은 것이 바로 체역집(替役集: 징역을 대신하는 시모음)이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3.이승만의 獄中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