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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_25편_중앙일보 2.이승만과 新舊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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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만기념관 댓글 0건 조회 492회 작성일 18-05-23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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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박사는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학자-논객이었다.

그는『독립정신』(1910)이라는 한글 책을 펴낸데 이어『미국의 영향을 받은(국제법상)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by the US1912)과『일본내막기』(Japa n Inside Out1941)라는 두저서를 영어로 출판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서울에서 매일신문(1898)을, 그리고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1914)를 창간해 편집인-주필로서 논봉을 휘둘렀다. 이외에그는 1백20여편의 한시(漢詩)와 많 은 한문휘호를 남겼다. 이같은 그의 학술. 언론인으로서의 실적은 동시대의 다른 세계적 정치가들의 업적을 웃도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李박사는 19세때(1894)까지 여느 양반집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科擧)등과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했다. 6세때 천자문을 완전히 외운 그는 줄곧 서울의 낙동과 도동에 있는 서당을 다녔다. 李박사는 어릴때 낭만이 깃들여 있는 이서당을 잊지못해 1957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친히「연소정」(巢亭)…제비가 둥지트는「정자」라는 이름을 지어 휘호하였다.

서당시절에 그는 유교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익히고 문장술을 닦는데 주력했다. 서당에서 치르는 시험(도강)에서 항상 장원을 했던 그는 13세때부터 나이를 속여 매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연거푸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17세때부터 한시를 짓기 시작한 그는 당음(唐音)을 즐겨 읊었으며, 국사(國史)에도 남다른 관심을기울였는데, 그가 역사적 인물중에 사숙한 위인은 성삼문(成三問)이었다. 서당에서 동양적 세계관과 충군애국사상을 체질화했던 그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서양의 신학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전쟁초반에 실시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전통적 교육이 쓸모없게 된데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노(老)대국 청국을 제압한 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각변동인가를 재빨리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1895년 2월에 신긍우(申肯雨.申興雨의 형님)의 권유와 인도로 서울 정동에 있는 미국인 선교학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던 것이다.

배재학당은 청년 이승만으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서양문명에 눈뜨게하는 별천지였다. 한국인.서양인.일본인.청국인이 두루 섞여 배우는 국제적 분위기의 학교였다. 이 학교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마도 그 뛰어난 교사진이었을 것이다. 이 학교 교장(당장) 앨리스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경우를 보면,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아 한국을 찾아온 이상주의적 선교사였다.
이승만에게 영어를 처음 가르친 노블(W A Noble) 의사라든가 벙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등 미국인 교사 모두 아펜젤러 못지않은 고학력과 사명감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이들 외에 당시 배재학당에는 한국인 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정규 고등학교및 대학교육을 마치고 의사가 되어 미국시민으로 귀화한 서재필(徐載弼:Philip Jaisohn)이 강사로 초빙되어 세계역사. 지리에 대한 특강을 베풀었다. 한마디로1895년께 배재학당의 교사진은 요즈음의 한국 일류대학의 인문학과 교수진에 비해 손색없었다.

***기독교 선교학교인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예배에참석했고 또 단발(斷髮)을 결행했다. 그러나 그가 배재학당에 들어온 주목적은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반년만에 英語강사 입학후 곧 동료간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얼마 안있어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신식병원의 미국인 여의사화이팅(Georgiana E Whiting)의 한국어 교사로 뽑혀 20달러의 월급을 받으면 그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대신 그녀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이승만의 영어실력이 얼마나 빨리 늘었던지 그는 입학후 반년만에 배재학당 영어반의 강사로 임명되어 주위로부터 천재라는 평을받았다.그가 2년반만에 배재학당을 졸업할때(1898년7월) 그는졸업식장의 6백여 내외귀빈 앞에서「한국의 독립 」이라는 주제로 영어연설을 하는 영예를 누렸다.

그런 배재학당이 그에게 가르쳐 준 가장 소중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새로운, 혁명적 정치사상이었다. 비록 재학기간에 기독교에 귀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기독교 교사들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유. 평등. 민권등 근대적 정치이념과 미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깊이 터득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서재필의 영향하에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 일에 적극 참여하면서 (배재)협성회(協成會)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또「협성회회보」를 창간해 그 주필로서 논설을 썼다. 바꾸어 말하자면 배재학당은 일개 시인(詩人)-한학자(漢學者)관료로 인생을 끝막음했을 뻔한 유생(儒生) - 이승만을 서구지향의 근대적 개혁가. 혁명아로 개조시켜 놓은 용광로였던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2.이승만과 新舊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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