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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 아버지 이경선(가운데)과 아들 이승만(오른쪽). 배재학당 입학전 18세 모습(1893년)<br />그는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부친 이경선,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 6대 독자로 출생했으며, 양녕대군이 그의 16대 조상이다
  • 구국 투쟁 중 투옥, 1903년 한성감옥에서 애국동지들과 함께(왼쪽 중죄수복장). 모진 옥중생활 중에서도 살아있는 눈빛이 인상적이다.<br />앞줄 오른쪽부터 이정식, 이상재 선생, 홍재기, 강원달, 뒷쪽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했던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의 아들)
  • 1904년 한성감옥에서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이다)<br />당시 어린이들도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청년 이승만은 옥중학교를 운영하여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 한성감옥의 동지들(안국선, 이승린)과 함께<br />
  •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br />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
  • 1904년 11월 미국에 밀사로 떠나기전 가족사진<br />오른쪽부터 박씨 부인, 이승만, 아들 태산, 아버지 이경선 옹 (뒤에 서있는 소년은 조카), 맏누님
  • 이승만(가장 왼쪽, 당시 29세)이 1904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밀사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른쪽부터)신홍우, 장홍범, 장(교포로 추정)과 함께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br />자신을 저술가로 소개하고 있다.
  •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워싱턴 D.C.로 향하던 중 시카고에 들려 그곳 한인유지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br />오른쪽이 이승만 (사진 : 기파랑 제공)
  •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1905년 8월)<br />
  • 청년 이승만<br />
  • 청년 이승만<br />
  • 이승만이 워싱턴 D. C.의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할 무렵 (1907년 7월)<br />학비는 장학금으로 면제받고, 생활비는 한국과 동양에 관한 강연으로 조달했다.
  • 조지 워싱턴 대학 재학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모인 국제기독학생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 두 번째)<br />
  • 하버드대 재학시절의 이승만과 그의 급우들. 가운데 앉아있는 인물은 브라운대에서 초빙된 국제법 담당 객원교수 윌(M.M.Wilson)<br />재학시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일어남으로 친일적인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부 학생들과 함께 (1909년)<br />이승만은 정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으나, 장학금 지급 관계로 신학부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 1906년 여름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만국 [기독]학도공회에 참가했을 때<br />
  •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을 때 묵었던 기숙사 방(1909년)<br />기숙사 건물 핫지홀(Hodge Hall)은 지금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 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국제정치학)를 받았다.<br />나라잃은 슬픔이 눈가에 서려있는 듯 하다.
  • 이승만 박사(맨 앞, 당시 36세)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YMCA 성경학교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br />프린스턴대 출신의 이승만은 미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버려두고 1910년부터 두 해 동안 YMCA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 1911년 YMCA 성경연구회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승만 박사(윗줄 오른쪽에서 두번째)<br />1년 5개월간 한국에 머무르다가 일본의 추격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 YMCA의 집회 모습(1911). 집회에서 악기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br />단상에 앉은 언더우드 옆으로 이승만의 모습이 보인다.
  •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귀국, YMCA에 재직하던 때의 이승만<br />
  • 서울YMCA 학감 시절, 주간학교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앞줄 왼쪽부터 4번째가 이승만)<br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막 귀국한 이승만은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임병직을 비롯한 많은 엘리트 청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 1911년 6월에 <기독학생 하령회>가 열렸던 개성의 한영서원<br />이승만이 앞줄 중앙에 앉아있다.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세운 학교로 지금의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이다.
  • YMCA 성경반 학생들과 함께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이승만 박사, 1912년)<br />
  • 1912년 3월 9일 서울에서 모인 <감리교회 각 지방 평신도대표 제14기 회의> 참가자들 (둘째 줄 가운데가 이승만)<br />이 회의에서 이승만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선출되어 다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서울YMCA 간부들과 함께 찍은 송별모임 사진(1912년)<br />이승만은 33년 후인 1945년에야 다시 귀국하게 된다.
  • 동경에서 열린 이승만 박사 송별회 기념사진 (1912년 4월6일)<br />앞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 이승만의 오른쪽이 김정식, 외쪽에 민규식. 뒷 줄 오른쪽 끝에 신석우, 오른쪽 끝에서 아홉번째에 문평일, 열번째에 김성수.오른쪽 원내는 안재홍.
  • 이승만이 일본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 의식화교육을 했던 일본 카마쿠라 세미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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