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미일전쟁 시기 美 7개 州 다니며 51차례 ‘독립’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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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정치학과·이승만연구원 소속 연구진, '국제정치논총' 게재 논문
1941~1945년 미일전쟁 시기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쳤던 연설 활동과 공공 외교의 양상과 의미를 분석한 자료가 나왔다. 연세대 정치학과와 이승만연구원 소속 한서영 연구원(박사 과정)이 최근 '국제정치논총 제61집 3호'에 게재한 '미일전쟁 시기 이승만의 연설활동과 공공외교, 1941-1945' 논문.
논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1939년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거처를 옮긴 후 1941~1945년 미일전쟁 시기에 연설 활동을 벌였다. 연구진은 이승만이 작성한 일기와 연설문, 미국 신문 기사 등에서 그의 행적을 추적했다.
조사 결과 이승만은 미국 7개 주(州), 13개 등의 도시에서 51회 이상의 연설을 했다. 강연 장소는 교회, 학교, 클럽 등이었고, 대상은 미국인들, 연합국 사람들, 세계 각지에 흩어진 한국인들이었다. 청중의 수는 최소 2명부터 수백 명까지 다양했다.
세부적으로는 대면 연설 36회, 라디오 연설 19회 이상 진행했으며, 이 중에는 대면 연설과 라디오 중계가 동시에 진행된 경우도 있었다. 지역은 워싱턴 D.C., 펜실베니아주,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뉴저지주, 버지니아주, 오하이오주, 메릴랜드주 등이었다.
연구진은 당시 이승만의 연설 활동과 공공 외교의 함의를 다음 3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인의 연합군 참전, 한반도 거주 한인들과 세계 각지에 흩어진 한인들에게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권고했다. 이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 보장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국인의 독립 소망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고 연합국에 한국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는 노력이었다.
둘째, 이승만은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맺어진 한미관계를 강조하며 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책임을 촉구했다. 아시아와 미국, 유럽은 서로 연대돼 있다는 인식 속에서 한국의 가치와 비전을 전했다.
셋째, 이승만은 연설 활동을 통해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증폭된 상황에서 일본의 선전 활동에 대항해 한국의 역사와 입장을 알렸다. 이는 일본에 대항한 네거티브 선전 외교이자 공공외교적 함의를 갖는 활동이었다.
연구진은 끝으로 이승만의 연설 활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이나 한국의 연합군 참전이라는 성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활동은 외국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한국의 입장을 알리고 한국에 대한 우호적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공공 외교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출처] 조선펍 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211034220&nidx=3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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