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이승만의 미국 강연 활동은 일제의 한국 침략 알린 ‘공공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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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에 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조선의 역사는 일본보다 뛰어나다.
조선은 반만년 이상 보존되어 왔으며 결코 지구상에서 말살되지 않을 것이다.”
- 1908.1.1 콜로라도 한인애국동지대표자 대회 연설에서 -
연세대 교수팀, 강연활동 분석… “美 전역서 5년간 200번 강연”
▲ 미국 유학 시절 뉴잉글랜드 지역의 국제기독학생모임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기독교 계통의 모임은 인종 간 분리가 성행하던 시절임에도 이승만에게 많은 강연 기회를 제공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제공)
많으면 한 달에 13번, 5년 동안 200번.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도미한 청년 이승만(1875∼1965)이 1905∼1910년 유학 중 강연에 나선 횟수다.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 시기 이승만의 강연은 미국에서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에 맞서 싸우는 공공외교였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연세대 박사과정 한서영 씨는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 예정인 논문 ‘미국 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서 이승만의 강연활동을 처음으로 분석했다.
“아시아 전체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구상은 러시아가 한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일본의 총은 소리 없이 심장을 저격합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의 신문 ‘모닝 스타’가 1907년 7월 25일 보도한 이승만 인터뷰다. 일본이 ‘열등한’ 아시아를 개화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자처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퍼뜨리고 있던 데 맞선 것이다.
이승만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도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906년 7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 각국 청년 대표 3000여 명이 모인 ‘만국학도공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석했다. 1908년 3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국제선교사대회, 1910년 세계주일학교대회 등에서도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 YMCA(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기독교 네트워크는 힘없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게 강연 기회를 제공했다.
분석 결과, 이승만은 그야말로 미국 전역을 누볐던 것으로 나타났다. 강연은 초창기 워싱턴을 중심으로 시작해 점차 미국 중·동부 지역으로 확대됐고, 적어도 10개 주 36개 지역에서 열렸다. 야외 공터, 가정집, 거실 모임 등 장소나 형식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이승만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앞장선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재판 통역을 요청받았으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변호할 수 없다고 거절해 한인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 노선 차이가 영향을 줬다는 게 오늘날의 해석이다.
논문은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공식적 외교 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공중에게 직접 한국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알리는 공공외교였고, 한국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문화외교였다”고 밝혔다.
[출처] 동아일보 조종엽 기자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703/962959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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