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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고 청렴했던 자린고비 일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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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검소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지냈던 지도자였다.


하와이에서 한인중앙학원 원장으로 수년간 재직 시 그는 봉급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관계자들조차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그가 이 학교를 떠날 때 이 사실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소명 그 이상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회고... 이승만, 국익 우선했고 검소했던 지도자

닉슨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아시아 순방 길에 한국을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닉슨은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 당시 이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는 이 대통령을 다른 아시아 국가 지도자들과 달리 국익을 우선했고 검소했던 지도자라고 평했다.

닉슨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이승만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닉슨은 아시아를 순방하고 있었다. 그 당시 닉슨의 눈에 비친 아시아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읽어보면, 이승만은 단연 군계일학이다.

닉슨은 인도네시아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의 궁전에 초대받은 이야기를 적었다. 수도인 자카르타는 엉망진창으로 더렵혀졌는데, 대통령궁은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닉슨은 “수카르노는 독립전쟁 땐 영웅이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탄했다. 비가 줄줄이 새는 대통령 관저를 수리도 못하게 했던 이승만과 대조적이다. 닉슨은 캄보디아의 국왕 시아누크에 대해서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음악만 이야기한다, 희망이 없다”고 평가했다. 베트남 국왕 바오다이는 고원 지역에 천국처럼 꾸며놓은 별장으로 닉슨을 안내했다. 그것은 닉슨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바오다이는 나라 일엔 관심이 없고, 개인 이익만 챙긴다”고 혹평했다.

이 대통령은 나라 일을 맡은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면 그런 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고 하여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도 지붕 새는 것을 수리하는 일 외에는 손을 못 대게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일본식인 경무대의 방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경비 절약을 위해 일제 시대에 만든 다다미방조차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김용삼, “나라 살림 검소하게 하라”, 미래한국, 2016.02.05.)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기록... 이승만, 청렴했던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저서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에서 이 대통령의 청렴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다음은 올리버 박사의 위 저서의 기록 중 관련 대목이다.

< 이 진술은 이대통령을 ‘부패하고 돈 많은’ 사람으로 단정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위해 기록해 둘 가치가 있다. 내가 23년간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보건대 그는 결코 부유하지 않았고 그는 확실히 개인적으로 부패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이 대통령은 ‘5퍼센트의 개인 커미션’을 받지 않으면 자기 나라를 위한 ECA(경제협조처: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 조차 승인하지 않았다고 알벤 버클리 부통령이 워싱턴의 어떤 칵테일 파티 석상에서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1975년 샘 레이번의 전기에도 밝혀진 것처럼 이런 비난은 아직도 지속된다. 버클리의 이야기는 잘못 인용되었거나 그릇되게 전해진 것이다. 이 대통령이 고집한 것은 대한민국이 군 장비 구매에 있어 ECA ‘대충 자금’의 적어도 5퍼센트 정도는 자체 재량대로 사용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자들은 모두가 부패되어 있다.” 이 말은 수에즈 운하 동쪽 즉, 아시아의 어떤 정부를 가리켜 말한 경우 하나의 상투적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운하의 서쪽에 위치한 여러 정부에도 마찬가지로 정확히 들어맞을 수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에게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말이 진실성 있게 들린다. >



백선엽 장군의 기록... 경무대에서의 생활

대통령은 매우 검소한 생활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든지 경무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아주 잘 차려진 식사를 함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령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쌀밥에 나물 반찬 몇 가지, 생선이나 고기 반찬 한두 점으로 차린 아주 소박한 밥상을 나누는 정도였다.

누군가와 환담을 하는 경우라도 대통령은 대개 간단한 과자 한 접시에 커피나 차 한 잔을 대접했다. 그 이상은 누구라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대통령의 태도는 매우 엄격했고 절도가 있다는 인상을 줬다.

그는 해외에 나가는 공직자들이 사용하는 달러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했다. ‘공직자가 나라의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달러 결제는 상당히 지독할 정도였다. 공직자 지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해외에 나가는 사람의 경비를 살피는 대통령의 기준은 ‘10달러’였다. 이 기준을 넘어서는 금액에 대해선 대통령은 그 해외 출장자의 경비를 샅샅이 살폈다. 조금 이상한 구석이라도 있는 경우라면 결재를 하지 않고 다시 검토하도록 서류를 되돌려 보내기 일쑤였다. 당시에는 외국에 출장 나가는 공무원이 매우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설령 해외에 나가더라도 풍족한 경비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대통령은 공직자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 줘야 한다는 점,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의 살림이 말이 아닌데 공직자들이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모든 경비 지출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 이승만 “공직자는 사심 없고 공정해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이 대통령 부부 내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살았고 민생을 우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1950년 10월 16일

< 대통령은 공직자는 사심이 없고 공정해야하며, 술 먹고 실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술과 담배를 일체 안 한다.

대통령도 젊었을 때 서당친구들과 어울려 시를 지으며 제법 술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문을 발행하면서부터 “나라 위해 중요한 일하려면 술 마시고 실수하면 안 된다”고 술을 끊은 뒤 담배도 입에 안 댄다. 윤석오 비서와 이기붕씨가 집에서 빚은 한국 술과 막걸리를 보내오면 “굶는 국민이 있는데 무슨 염치로 내가 경무대에서 쌀로 빚은 막걸리를 마실 수 있겠는가?”하며 못 가져오게 했다. >

1950년 8월 10일

<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의 잔등은 모기에 물린 곳까지 겹쳐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에 적셔 대통령의 땀을 닦았지만 땀띠는 점점 심해져 진물까지 흘렀다. 나는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고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무초 대사나 워커 장군, 그리고 우리 집에 드나드는 미국인들은 나를 보면 “마담 리,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들에게 사사로운 부탁은 일체 못하도록 나에게까지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참다못해 워커 장군에게 땀띠약을 부탁했다. 장군은 땀띠연고 외에도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를 한 박스 보내왔다.

그런데 내가 부엌일을 보러 잠시 들어간 사이에 약상자가 대통령의 눈에 띄고 말았다. 대통령은 나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아침보고를 하러 들어온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군인들)에게 갖다 주라”며 약상자를 맡겨버렸다.

약상자뿐만 아니라 친정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합쳐 주어버린 것이다. 내가 부엌에서 나올 때 신 장관이 막 약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말도 못한 채 땀띠연고 하나만 빼놓으라는 사인을 신 장관에게 보냈다. 장관은 알았다는 듯 슬쩍 한 개를 빼돌리려했다.

그때 뒷머리가 따갑다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대통령이 무서운 눈으로 우리 두 사람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나는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장관도 멀쑥한 표정으로 냉큼 나가버렸다. 평소에도 남에게 무엇을 줄 때는 나에게 물어보는 법이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성격에 자신의 땀띠를 치료하겠다고 얻어 온 약을 전선에 보내면서 내 의사를 물어볼 분이 아니었다. >

이 대통령 내외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하와이로 떠날 때 소지품은 단 4개의 트렁크뿐이었다. 하나는 이 전 대통령의 옷, 하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옷, 또 하나는 소지품과 기내에서 먹을 점심과 약품이 든 상자, 나머지 하나는 이 전 대통령이 평생 사용해왔던 고물 타이프라이터가 전부였다.

평생 청렴하고 검소했던 대통령 내외의 면모가 다시금 확인되는 장면이다.



며느리 조혜자 여사의 증언... “닳아 구멍난 속옷, 꿰매 입을 정도로 검소”

이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는 2009년 1월 14일 방영된 CBS TV에 출연해 이 전 대통령 내외가 얼마나 검소했는지 생생한 경험담을 전했다.

다음은 조 여사의 증언이다.

< “밥알 한 톨, 두부 한 조각, 콩나물 한 가닥도 함부로 못 버리게 하셨어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프란체스카 여사는 평소 성품이 검소하고 수수한 여인이었다. 아들 이인수 박사가 출장을 갔다가 사다준 양산을 30년 가까이 사용했고, 40년간 아껴서 입은 검정예복을 며느리 조 여사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정도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속옷이 닳아 구멍이 나도 실로 꿰매 다시 내 놓기도 했단다. 시아버님이 시어머님 앞에서는 고맙다 하셨지만 뒤로는 “에휴... 이것도 한두 번이지”하고 푸념을 하곤 하셨어요. 조혜자 여사는 1976년 “한 회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했을 때도 전력난이 이렇게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수 있겠냐며 돌려보낼 정도 였어요”라고 하며 시어머니의 지독한 절약 습관을 회상했다.

식사 기도를 하실 때는 우리나라에 밥 굶는 국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저희 아이들 목욕도 마음껏 씻지 못하게 하셨어요. 평소 근검절약이 몸에 베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달동네 아이들은 식수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데 우리도 아끼자”라고 하면서, 이화장의 모든 생활수준을 서민들에 맞추어 생활하게 했다고 말했다.

(황민규, “이승만 전 대통령도 기운 속옷 입었어요”, 크리스천노컷뉴스, 2009.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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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아버지님의 댓글

건국의 아버지 작성일

“일선의 우리 아이들(군인들)에게 갖다 주라”며 약상자를 맡겨버렸다. 이 부분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터져나왔습니다... 군 통수권자인 사람이 본인이 땀띠로 괴로운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한때 군인이었던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저런 대통령 아래에 있는데 어찌 목숨걸고 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약통 하나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군 장병들에게는 엄청난 사기 진작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부분 '식사 기도를 하실 때는 우리나라에 밥 굶는 국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 하셨어요'를 보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셨음에 이 민족에게 풍요로운 축복을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또한 이 민족에게 이러한 엄청난 지도자를 주심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건국의 아버지가 전 국민에게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승만 박사님이 이 땅에서는 온갖 고초를 겪으셨지만 지금은 천국에서 편히 쉬고 계심에 안심이 됩니다. 박사님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념관 관리자 여러분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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