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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유래가 없어 더욱 찬란한 업적 - 이승만의 『농 지 개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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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왜 한국이 성공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옛날 지도자들이 실책을 더러 했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씩은 다 했다.

자유당 시대를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은 됐지만 암흑시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때 토지개혁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졌는데도 국가독립, 안정을 지켜냈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체제를 지켜냈다.”

- 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 



한국 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 라고 묻자,

룰라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브라질의 경제는 사회개혁 없이 심각한 불균형성장을 해왔던 것이 문제지요.”  


1950년 김일성은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키면서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확신했다.

군사력 우위는 물론이고, 38선을 밀고 내려가면 남한 농민들이 대거 봉기해 자신들 편에 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다수의 한국인들이 김일성을 외면했다. 1945년 광복 직후만 해도 남한에서 좌익의 입지가 컸던 점을 감안하면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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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1950년 3월과 4월 농지개혁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잇달아 공포해 농지개혁을 마무리했다. 소작농이었던 167만여 가구가 자작농으로 변신했다. 전쟁이 터지기 불과 두 달 전 끝난 농지개혁은 당시 한국인의 절대 다수였던 농민들에게 땅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어주면서 대한민국 체제에 일체감을 갖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지주들의 사유재산권을 일부 제한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와 시장의 원리’를 존중했다. 농민들은 새로 얻은 농지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했다.

농지개혁이 한반도의 적화를 막고 훗날 박정희 정부 시절 산업화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반면 북한은 농지개혁 후 최고 40%의 현물세를 물렸고 얼마 뒤 농민의 땅을 모두 빼앗아 국가에 귀속시켰다. ‘지주의 소작인’이 ‘국가의 소작인’으로 달라진 데 불과했다.

남미, 필리핀, 인도에서 지금도 소수 특권 지주층의 토지 과점에 따른 갈등이 심각한 현실을 보면 농지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새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혼돈의 해방 공간에서 우남 이승만이 해공 신익희, 인촌 김성수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진영의 대한민국을 출범시키고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건국과 호국’의 공로 역시 마찬가지다.




[출처] 동아일보 2015.3.30. 권순활 위원 사설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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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0년 4월 7일자 2면.

역사적『농개(農改)』수(遂)착수, 155만호에 분배, 전농가의 삼분지이에 해당, 귀속농지분배도 행정관청서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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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8.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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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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