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싸움에서 미국을 꺾은 외교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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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반공포로사건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까지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1951년 6월부터 전쟁 당사자간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된다. 그러나 회담은 진전이 없었고 양 진영은 1953년 3월에도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황이 계속된다.
처음 미국의 입장은 이승만과 같이 한반도의 통일이 목표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며 한반도의 자유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한다. 미국은 군사적 수단을 통해 북한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으며 상황이 어려워진다면 중국 본토에 핵무기를 쓸 수 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는 상황이 우려되었다.
미국의 기밀해제된 NSC 48/5 문서를 보면 미국의 38선 이북 진출을 금지함과 동시에 NSC 118/2에서는 소련이나 중공과의 전면전 발생 억제를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1952년 11월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미국 3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을 위해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희생을 더 이상 원치 않았던 미국인들의 바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6.25전쟁으로 인해 36,000명 이상의 사망 및 실종자와 10만 명이 넘는 부상자, 그리고 670억 달러라는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로 인해 미국에서는 6.25전쟁의 빠른 종결과 국방예산 감축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아이젠하워는 “한국 전쟁의 신속한 종결”이라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이 된다.
미국은 군사적 수단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을 달성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전 후 한국을 포기할 생각도 결코 없었다. 당시 세계 정세는 미국(자유진영) vs 소련(공산진영)의 세력싸움에서 약소국들이 어디에 줄을 서야할지 간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유럽의 약소국들이 미국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공산권에 가담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되었다.
이러한 미국과의 입장과는 별개로 이승만은 정전협정 이후 벌어지게 될 상황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여전히 한반도에는 중공군이 남아있었고 이를 해결하지 않은 채 섣불리 정전협정을 맺는다면 공산군들이 내려와 한반도를 재침략하여 공산화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이 이승만은 정전협정 전에 한국의 확실한 안보를 조약으로 보장받기 위해 미국에게 끊임없이 요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승만의 요구에 아이젠하워는 단숨에 거절을 한다. 그 이유는
①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어떤 나라보다 많은 경제 원조와 안보 지원을 받고 있어 굳이 명시된 조약이 불필요하다.
② 중국이 남하할 시 더욱 엄격한 군사적,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UN차원에서의 ‘대제재선언’이라는 안보공약이 있다.
이러한 미국의 완강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또다시 주장한다. 한반도 북쪽에 중공군을 놔둔 채로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한국에게 사형선고와도 다름없으며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수와 함께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한다.
당시 미국은 중공군의 한반도 잔류에 대해 별로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의 안보를 위해 중공군의 한반도 잔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국은 독자적으로 북진을 감행하여 민족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통일을 마무리 지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6.25전쟁이 일어난 김에 끝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을 해아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하지 않으면 분단이 고착화되어 후손들이 그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단독 북진 감행이라는 얘길 듣자마자 미국은 엄청난 위협을 느끼게 된다. 2년 동안이나 노력해 온 정전협정이 평화적으로 마무리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에, 이승만이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한다면 신속하고도 평화적인 정전협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미군의 안전 또한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으며 한국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면서도 상호방위조약은 고려할 수 없으며 중공군의 철수는 정전협정 전이 아니라 후에 정치회담을 통해 다시 논의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이승만의 단독 북진 감행이 미국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한 이유는 바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생사가 걸린 문제임과 동시에 미국 내의 계속된 전쟁 비판 여론 때문이었다.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이승만이 초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데 이승만이 요구하는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주자니 빠른 정전협정에 방해가 되며 그 조약을 믿고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고 빨리 정전협정을 마무리 짓자니 이승만이 멋대로 유엔을 탈퇴하고 또 단독 북진을 하겠다고 얘기한다. 이승만은 미국에게 계산하기 너무 어려운 존재였다.
이렇듯 한국과 미국은 각각 다른 위험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보장받지 못한 채 버려지게 될 두려움.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단독 북진 감행으로 전쟁이 재개되어 다시 연루될 두려움.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단독 북진 감행이라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에버레디플랜(Ever-Ready Plan)’을 구상한다. 이승만이 단독 북진을 감행하려고 하면 그를 암살하고 한국 정부를 전복시켜 미국에 호의적인 인물(장면 등)을 앉히려는 계획이었다.
계속된 양국의 입장 차로 미국은 여러 고민에 빠지게 된다.
① 미국은 자국이 아닌 UN을 통해 정전협정 체결과 대중 억지 정책으로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었음.
② 빠른 정전협정 체결을 위해선 이승만의 협조가 필요한데 단독 북진 감행의 가능성이 존재함.
③ 만일 상호방위조약을 해주면 그것을 믿고 이승만이 군사행동을 실시해 북진 통일 실행에 옮길 가능성도 존재함.
결국 미국은 이승만과 서로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953년 5월 12일, 이승만과 UN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만난다. 클라크는 이승만에게 미국의 입장과 조건을 잘 설명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진의를 파악하여 미 합동참모본부에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면담 도중 수면 밑에 있던 문제가 떠오르게 되는데 바로 반공포로 문제이다.
반공포로는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자유진영에 남고 싶어하는 전쟁포로를 총괄하는 명칭이었다. 휴전회담이 1년 넘게 지연되었던 이유도 반공포로의 처리에 대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견 차이가 좁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자유진영은 포로의 인권을 존중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자유송환 원칙을 제시했으나 공산진영은 제네바 협약에 입각해 모든 포로들의 원칙적 본국 송환이라는 강제송환 원칙을 제시한다.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공산진영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바로 중립국인 인도로 반공포로들을 보내어 90일 동안 본국에서 특파된 요원으로 하여금 설득기간을 거치고 기간이 지나서도 송환거부 의사를 밝히는 포로는 자신의 의사를 따르게 한다는 제안이었다. 연합국(자유진영)측도 계속된 갈등 속에 지쳐가던 중 이 제안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지만 섣불리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 당시 인도는 명목상으로는 중립국을 표했지만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다분히 받고 있는 국가였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에서 반공포로를 인도로 보내는 것은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로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있을 수 없는 부당한 대우라며 공산진영의 제안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5월 12일 면담에서 이승만은 클라크 장군에게 반공포로를 인도로 보내는 것을 강력히 항의한다. 이에 클라크는 이승만의 입장을 자신도 동의하며 연합국들 또한 동의를 표할 것이나 이승만에게 반공포로의 석방과 관련해 단독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한다.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해서도 논의하는데, 미국은 여전히 체결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미국은 구두로써 끝나는 안보보장만을 원했지, 조약까지 체결하여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당시 한반도의 상황을 다시 짚고 넘어가자. 한반도에서는 2개의 교섭이 진행중이었다.
① 6.25전쟁의 정전을 위한 자유진영 vs 공산진영 간의 교섭
② 한국 vs 미국 간의 교섭
그렇다면 한국과 미국 간의 교섭에 따르는 각 국의 이익은 무엇일까?
미국의 첫 번째 이익은 6.25전쟁의 신속하고도 평화적인 종결. 두 번째 이익은 미국의 영향력이 감소된 구두로써만 끝나는 손쉬운 안보보장 (UN차원의 ‘대제재선언’)
이에 반해 한국의 국가이익은 첫 번째, 북진통일로 민족적 대업을 이루는 것. 두 번째 이익은 통일을 못할 경우 차선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한 안보체제 확립이다.
이처럼 종전을 앞두고 각 국은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게 된다. 미국의 첫 번째 이익은 한국이 단독으로 북진 감행을 하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얻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두 번째 이익까지 보장받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북진을 감행해 판을 깨버릴 가능성도 존재했었다.
아이젠하워는 고민에 빠졌다. 한국이 원하는 상호방위조약의 성격(한국이 공격당한다면 미국의 자동개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두로써만 끝내고 법적효력이 없는 UN차원의 대제재선언을 한국에게 내밀며 UN차원에서 안보를 보장 해줄테니 굳이 명시된 조약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운 것이다.
회담 후 열흘이 지난 5월 22일, 아이젠하워는 한미간의 갈등 요소와 정전협정의 조항들을 정리하여 클라크 사령관과 주미대사 브리그스에게 이승만을 만나서 정전협정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입장을 전달하고 이승만이 받아들이게끔 할 것을 지시한다.
5월 25일, 클라크와 브리그스는 이승만을 만나지만 이승만의 태도는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정전협정과 반공포로석방 문제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으며 대제제선언의 실질적인 효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다.
이 면담을 통해 클라크와 브리그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바로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단독 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누구나 한 번 생각은 해 볼 수 있는 문제였지만 현실에서는 시도조차 하기 두려운 대단히 모험적이고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클라크는 이런 사실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2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에 보고 한다.
미 국무부-합참은 워싱턴 시각으로 5월 29일 오전 11시, ‘남한에서 가능한 비상조치(Possible Emergency Actions in South Korea)’를 주제로 회의를 열게 된다. 회의의 핵심 주제는
① 한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키는 문제
② 비상 상황 시 남한 정부를 전복할 권한이 미국에게 있는지에 대한 문제
③ 한국에 대한 상호방위조약의 제안에 관한 문제
1번의 미군 철수는 정치적 문제 뿐만 아니라 군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나지 못한다.
2번에 대해서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에버레디플랜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실행될 것이며 가능하면 한국인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을 결정한다.
3번에서 기존 미국의 입장이 바뀌게 되는데 이는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작용한다.
당시 해군 부참모총장이던 던컨 제독은 이승만이라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그에게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카드를 제안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 판단한다. 즉, 이승만의 단독 행동을 염려한 미국은 채찍이 아닌 당근을 주어 이승만과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합동 회의에서 이 내용은 결국 채택이 되고 30일 아이젠하워에게 보고가 된다. 아이젠하워는 내용을 보고 받고 나서 현 상황에서 실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조약에 대한 협상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제안을 하라고 결정한다. 단, 하나의 조건이 붙었는데 그것은 이승만에게 정전협정에 대해 절대적으로 협조하고 단독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인 30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은 이전과 같은 중국군과 UN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 상호방위조약의 우선적 체결, 한국군의 증강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미국 관료들은 이승만의 어조가 과거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평가한다. 또한 이승만이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훗날 이것은 미국이 이승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반증이 된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6월 6일 답신을 보내게 되는데 문제는 상호방위조약의 협상 날짜였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이전에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나 아이젠하워는 신속한 전쟁의 종결이 목적이었기에 정전협정 이후에 논의하자고 단언한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면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겠다는 미국의 정책 변경은 정전협정을 방해하기 위한 한국의 단독 행동(반공포로석방, 단독북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준 게 절대 아니다. 한국과의 외교적 수싸움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한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6월 4일, 정전협정이라는 씨름이 계속되고 있는 판문점에서 공산진영은 기존의 제안에 몇 가지 사항을 추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바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에 대해 중립국송환위원회에서 120일간의 체류 기간을 거친 후에 포로를 시민 자격으로 변경해 주고 원하는 경우에는 중립국으로 보내도록 지원해주자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반공포로 처리 문제 때문에 시간이 끌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공산진영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라며 호평하고 정전협정 체결에 박차를 가한다.
정전협정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6월 5일, 클라크와 브리그스가 상호방위조약의 협상 제안을 허락받은 권한을 가지고 이승만을 만나 한국의 정전협정 협조를 다시 확인 받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대한 UN의 최종안에 여전히 불만을 표시했으며 그들은 이승만에게 미국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재차 거센 압박을 가한다.
6월 9일, 미 합참의장 테일러가 이승만을 만나는데, 이승만은 여기서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이젠하워에게 반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에 왜 정전협정에 반대하는지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이승만에게 정전협정과 관련되어 한국이 인도와 공산국가의 대표단이 파견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포기하라고 권유한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러한 테일러의 보고에 덧붙여 아이젠하워에게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이 기정 사실화가 되었다는 것을 이승만 자신도 깨달았고, 정전협정을 빠르게 체결하여 이승만의 단독 행동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최종 보고한다.
이로써 미국은 이승만에게 자신의 힘으로는 정전협정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빠른 정전협정 체결에 박차를 가하여 6월 18일 최종적인 체결만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미국이 바라는 그림이 모두 그려지고 마지막 작업만이 남아있는 듯 했다..
하지만 18일 새벽, 전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승만은 미국과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18일 새벽, 약 2만7천명의 한인 반공포로를 일제히 석방하는 단독 행동을 감행한다. 이 사건의 여파로 18일 예정되어있던 정전협정의 체결은 무산된다. 아침이 밝자 이승만은 미국을 겨냥한 듯 성명을 발표한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국의 입장을 현실화하기 위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걸고 실행한 최대한의 행동이었으며, 이 계획을 미리 알았더라면 미국이 난처함에 처할 것이 분명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인도의 군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반공포로를 관리하며 포로들을 세뇌시킬 상황을 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것은 개인만의 의지가 아닌 국가와 민족의 의지가 반영된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고 발표한다. 또한 이 행동은 미국이 우려하던 ‘단독 행동’의 시작이 아니라고 약속하며 한미 양국에서는 이 사건을 오해하여 더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을 조심하자고 당부한다.
이제 미국은 공산군과 이승만이라는 두 적과 대면해야 했다. 이승만은 이미 대공, 대미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미국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바로 제150차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을 소집한다. 이 회의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국장 등 핵심인사가 모두 참여했다. 그들은 이승만의 반공포로에 대해 매우 심도있기 논의한다.
이승만에게 충격을 받은 아이젠하워는 NSC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 대신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난 것 같다!”
그러나 이승만이 반공포로석방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미국도 5월부터 어느 정도 짐작을 했고 사실 그 방법 말고는 반공포로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자신들도 인정한 바가 있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을 어떻게 해서든 달래서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다고 결정한다. 또한 이승만이 성명을 통해 그 의도를 명확하게 밝혔기 때문에 사실상 이승만의 행동을 인정하게 된다.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 이후 이승만에게 매우 강한 위협을 느끼고 직접적인 대화만이 갈등을 풀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미국의 아시아 극동담당 차관 로버트슨을 특사로 파견한다. 회담은 6월 24일부터 7월 12일까지 계속되는데 이승만은 여전히 단호했다. 한국은 미국에게 1910년의 한일합방, 1945년의 분단으로 두 번씩이나 배반당했다면서 미국을 압박했고 이 압박은 결국 주효했다.
① 미처 석방되지 못한 반공포로는 자신들의 의사에 따라 한국 또는 대만으로 보내져야 함.
② 정치회담이 결렬될 시에는 미국이 한국과 함께 북진하여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것.
③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
④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즉시 체결할 것.
이에 로버트슨은 한국이 더 이상의 정전협정 방해를 그만하고 정전 이후 이행조건에 순응하며 UN군을 탈퇴하여 북진하는 독자행동을 금한다면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며 한국군의 증강과 반공포로 처우에 대해 동의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군의 철수에 대한 문제는 정전협정 이후의 정치회담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문제였다. 또한 회담이 성과 없이 결렬된다 하더라도 미국은 한국과 함께 자동적으로 북진하겠다는 약속을 줄 수도 없었다. 미국은 난처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자동 북진은 불가능함을 설명하며 만약 정치회담이 결렬된다면 그 다음의 행동은 반드시 한국과 상의하여 최대한 협조를 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 대목에서 외교책략가 이승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휴전협정 준수’를 요구하는 미국 측에 끝까지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라는 정도의 기록만을 남겼다. 그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관심을 끌고 갔던 것이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으나 이쯤되면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승만은 계속해서 정전협정 이전에 상호방위조약 초안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조약의 비준이 상원의원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한 보장을 해줄 수 없지만, 협상은 당장 시작해 줄 수 있다하며 이승만을 달래라고 로버트슨에게 얘기한다. 그리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초안이 작성된다.
이어 이승만은 조약의 신속한 비준을 원하지만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개원이 1954년 1월, 즉 다음해 초였기 때문에 다음 회기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이승만도 인정하고 드디어 정전협정 체결에 동의를 하겠다고 말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협상의 제안과 대제제선언의 문제점을 반영하는 사안이 7월 3일, 미 국가안보회의에서 논의 된다. 여기서 아이젠하워는 중국이 한반도에 남아있는 한, 그들을 확실한 침략자(plain and simple aggressor)라고 규정짓고 이승만이 미국에게 많은 말썽을 일으킬 정도로 어려운 존재이나 중국을 봉쇄하는데 그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계속된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NSC에서 거듭된 수정을 거쳐나가며 1953년 7월 미국은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협조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후의 전략을 설계한다. 초기에서는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부인했으나, 이제는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국과 함께 중국에 대한 억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우회한 것이다.
드디어 7월 27일, 미국을 대표하는 자유진영과 소련을 대표하는 공산진영간의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승만은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과 아이젠하워의 노력과 인애에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이에 미국은 약속한 대로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착수하겠다고 말한다.
조약의 체결을 위해 미국은 덜레스 국무장관을 파견하여 8월 5일부터 8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여 양국 간의 의견 조율을 한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과 덜레스는 7일 조약의 내용을 발표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과 미국 간의 수싸움 사이에서 탄생한 조약이며, 한국은 이 조약을 토대로 굳건한 안보를 보장받게 되었고, 이는 향후 한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다.
실로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10월 1일, 미국의 워싱턴에서 한국의 외무부장관 변영태와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가 만나 조약에 서명하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최종적으로 체결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철저히 한국과 미국 간의 외교적 수싸움에서 탄생한 조약이고, 국제 외교관계에 있어 모든 것은 이해 관계에 입각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국이 순전히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조약을 맺은 것이 아니다.
6.25전쟁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 그런 나라의 지도자가 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동등한 위치로서의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였다.
이승만은 조약이 체결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 후손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