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현실주의 외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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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이승만은 당시 프린스턴 총장이었던 우드로 윌슨(훗날 28대 미국 대통령)의 큰 기대를 받았다. 그는 이승만을 조선의 미래를 이끌 지도자라고 격찬했으며 이승만에게 연설할 기회도 자주 주었다. 이승만에게 박사 학위 수여를 결정한 인물도 윌슨 총장이었다. 그래서 윌슨의 사상과 이승만의 국제관에는 상당 부분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박사논문 제목은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다. 이승만은 박사논문을 통해 전쟁 중에도 무역이 가능해지는 국제 관례를 만든 나라는 미국이며 미국이 지금까지 유럽의 강대국들과 맞서면서 어떻게 중립노선을 추구해왔는가를 추적했다. 그리고 미국의 중립노선이 중남미국가들의 독립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이 논문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윌슨은 실제로 1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역할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 논문은 이승만이 외교사에 해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전철을 되밟는 과정이 많다. 따라서 뛰어난 외교관이란 역사에 해박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통해 자신의 역사 지식을 강화시켰고 그 역사 공부가 이승만의 뛰어난 현실 감각과 외교 안목을 길러주었다.
미국에서 외교사를 공부한 이승만은 외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외교는 힘있는 나라가 주도하기는 하지만 주도해가는 과정에서 절차와 명분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약소국도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의 관점이었다.
이승만의 외교는 참으로 능수능란했다. 트루먼이 허술한 인물이 아닌데도 이승만에게 끌려다닌 것은 그만큼 이승만이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승만은 '미국은 중립을 존중한다'는 형태에 집착하는 미국 정부가 국제무대에서의 파트너를 원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중남미에서 미국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친미정권이 들어서면 좋아하는 미국을 관찰하면서 한국도 강대국의 대등한 파트너가 될 가능성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민족주의가 정의로 포장되는 한국에서 이승만 정도의 안목을 지닌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한민족의 엄청난 행운이었다.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만의 힘으로도, 일제의 협력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미국이 거저 내려준 선물도 아니고. 윈스턴 처칠처럼 공산주의의 위험을 간파했고 엄청난 외교전을 통해 미국 정부로 하여금 조선을 독립시키는 게 미국의 이익에 더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든 이승만의 노력 덕분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처음 남한에 주둔했던 군정 사령관 존 하지(John Hodge) 중장과 무서울 정도로 충돌했다. 정치에 안목이 없는 하지 중장이 공산주의자들과의 연립 정부를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 중장이 고아원 출신에 학력이 짧은 군인이었기에 프린스턴 박사 출신 이승만은 "너하고는 이야기가 안된다. 네 윗사람 데려오라"고 신경을 긁었을 정도로 하지에게 양보를 하지 않았다. 하지도 1차세계대전부터 참전하여 중장(lieutenant general)까지 오른 인물인데 그런 인물에게 정면으로 덤비는 행위는 도박이라면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외교사 공부를 통해 다져진 확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