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 창간 - 이승만의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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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민간(民刊) 일간신문은 무엇일까.
독립신문? 아니다. 매일신문이다.
매일신문을 창간한 사람은 누구일까. 서재필? 아니다. 이승만이다.
서재필이 창간(1896년)한 독립신문은 주간지였고 일주일에 두 세 번 발행하기도 했으나, 매일 발행한 신문은 제호대로 매일신문(영어명칭 Daily Newspaper: 1898년)이다. 또한 서재필은 미국인(망명후 미국귀화)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민간 일간지는 이승만이 발행한 매일신문이다. 우리 언론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우리 언론계는 1957년 독립신문 창간일(4월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오랫동안 신문휴간까지 하면서 기념일로 지켜왔다. 당시 대통령은 이승만인데 왜 독립신문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정했을까. 아마도 이승만이 옛 스승 서재필에게 양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승만은 그러면 왜 매일신문을 창간했을까.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무지한 국민을 하루 빨리 가르치고 계몽해서 ‘똑똑한 국민’으로 만들고 싶었다.
▲ 서재필의 지도아래 조직한 학생회 '협성회'의 신문. 이승만이 기사-편집을 도맡았다.
정동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이 만든 학생조직 ‘협성회’ 지도자로 협성회보 주필이던 이승만은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일간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협성회보를 일간지(매일신문)으로 바꾸어 버렸다.
대표-주필-기자로 1인3역을 자임한 23세 청년 개혁운동가 이승만, 한국에서 ‘기자’(記者)란 호칭를 처음 쓴 것도 그였다. 국문(한글)전용인 독립신문에 논설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매일신문도 국문전용으로 내면서 ‘한글 전용론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한문(漢文)을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썩고 잘못된 습관에 물들어 기대할 것이 없고...(중략)...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고 아래로부터 변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며 죽은데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 이것이 문맹률 90%의 왕국을 개명시키려는 이승만의 꿈이었다.
▲ 독립신문과 학생지 협성회보를 만들던 이승만은 "날마다 신문을 내자"며 [매일신문]을 창간하였다(1898.4.9).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지다.
▲ 이승만이 두번째로 창간한 일간신문 [제국신문] 100호.
◆ 독립투쟁의 무기- 식민주의 러시아와 싸우다
‘아관파천’이래 이완용의 친러파 정권은 러시아의 이권요구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나고 있었다.
창간 한달이 넘은 5월16일자 ‘매일신문’은 러시아와 프랑스가 정부에 대규모 이권을 요구한 비밀 외교문서를 2개면에 걸쳐 폭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일대의 땅과 섬을, 프랑스는 평안도 석탄광산 채굴권을 요구한 내용이다. 이승만은 특집기사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을 때 치가 떨리고 기가 막히어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지라. 대소 인민간에 이런 소문을 듣고 잠시인들 가만히 있으리오. 우리 동포들은 일심으로 발분하여 속히 조치할 도리를 생각들 하시오.”
이 특종의 충격은 당장 국제문제화 했다. 러시아와 프랑스 공사들은 외부(外部:외교부)에 외교기밀 누설에 항의하고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외교부는 매일신문 기사 책임자 이승만을 소환했다. 그러나 질책하는 관리들을 이승만이 신랄하게 비판 설득했다.
“외부대신이 외국인이 아니고 외국관청이 아니거늘, 나라 일을 외국 공사와는 몰래 의논하면서 백성들 모르게 할 이유가 어디 있소? 우리가 나라를 위하지 말고 외국을 돕는 신문을 만들라는 말이오?...(중략)...우리 신문기자는 대한의 신하요 백성인즉 자기나라를 위하여 한 일을 외국공사가 막을 권리는 없소.” 이승만은 정부 관리들이 애국심도 배짱도 없다고 분개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승만은 한술 더 떠서 원산항에 주둔한 러시아 병사들의 행패를 연일 대서특필했고 날마다 논설로 공격했다. 마침내 정부와 러시아-프랑스는 두 손을 들었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벌어진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기밀’에 관한 분쟁은 이승만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독립협회의 첫 외교적 승리이기도 했다.
◆ ‘제국신문’ 창간- 일본인들의 행패를 고발하다
‘매일신문’을 창간한 같은 해 이승만은 새 일간지 ‘제국신문’도 창간했다. ‘대한제국’의 새출발을 기념한 신문이었다. 예리한 논리와 기발한 비유, 절묘한 풍자로 국민을 설득하고 선동함으로써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성가를 높였는데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와의 논쟁이 유명하다.
정치적으로 러시아가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일본이 지배하는 대한제국, 당시 한양의 일본인은 1만5천여명으로 한국인에 대한 폭력과 행패가 극심했다. 이를 좌시하지 못한 이승만은 ‘대한 사람 봉변한 사실’ ‘일본의 하등인들’등 일본인들과 상인, 일본경찰의 부당한 횡포를 집중적으로 고발했다. 이에 한성신보가 비판하고 나서자 사설논쟁을 포한한 장기투쟁이 이어진다. 러시아와 일본은 합세하여 정부에 ‘보도 규제법’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이승만이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활동을 주도하면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은 외세 침략의 배격과 국가 개혁운동에 최대한 활용된 무기가 되었다. 1899년 1월 투옥된 뒤에도 이승만은 옥중에서 3년간이나 신문 논설을 써서 게재하였다.
그는 왜 투옥되었던가. 한국 시민혁명의 효시가 된 이승만의 그 투쟁은 숨가쁜 드라마다.
<출처> 인보길의 역사올레길 ©시장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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