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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미국 폭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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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17일에 찍은 대통령과 그의 크라이슬러. 이 차로 줄곧 운전을 하며 신혼여행도 다녔다 

 


이승만의 난폭운전

`
허니, 플리즈 슬로 다운(여보, 제발 속력 낮추세요). 나 정말 겁이 납니다.`
`
오케이, 돈워리 허니(알았소, 걱정 말아요).`
`
오우, 백주에 헤드라이트 켜고 140km로 달리면 어떻게 해요.`
`
할 수 없소. 워싱턴 프레스클럽에 강연시간이 촉박해 달려야겠으니 꼭 잡고 걱정 말아요. 나의 운전솜씨 당신도 알지 않소.`
`
웨엥….`
`
아구머니나! 기어코 패트롤카에 들켰어요 경찰이 뒤따라와요, 여보.`
`
오케이, 나도 스피드 더 높여야지. 붙들리면 중요한 강연이 허사가 돼요. 두 눈 감고 꽉 움켜잡아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때 순간적이지만 '이 분과는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차를 탈 때마다 간이 콩알만해지니 살 수가 있어야죠."


1930
년대 초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남 이승만 박사는 넓은 땅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미국인들에게 조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스케줄을 지키기 위해 자동차는 그에게 필수적이었다. 우남은 20년대에 이미 운전을 배워 능숙한 운전자가 되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의 우남이 일단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과속에 난폭운전사로 돌변, 시속 100km는 보통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일평생 사고 한 번 안 낸 운전자로도 유명했다.

1934년의 일이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로 되어 있는데 뉴욕에 왔다가 볼 일 때문에 약간 늦게 출발했다. 시간이 촉박해진 우남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과속에 난폭운전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된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서 겸 타이피스트로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이 날도 옆자리에 동행하던 여사는 다른 날보다도 더 과속, 난폭운전을 하는 우남 때문에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백주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도 무시한 채 시속 140km를 넘나드는 과속으로 질주하던 우남의 차는 두 대의 경찰 오토바이에 걸려 쫓기고 쫓는 레이스가 펼쳐졌고, 결국 우남의 승리로 끝났다. 정시에 프레스클럽에 도착한 우남은 쏜살같이 강단으로 올라가 능숙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의 연설에 매료된 청중들은 수십 번의 기립박수로 열광했다.
얼마 후 겨우 따라온 경찰관들은 험상궂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강연장 입구에 버티고 서서 `나오기만 해봐라. 단번에 체포해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경찰관들도 어느새 우남의 열변에 말려 들어가 자기들도 모르게 그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우남에게 두 경찰관은 승리의 V자를 손가락으로 만들어 보이면서 히죽 웃었고, 옆에 따라 나오는 프란체스카의 귀에다 대고는 `기동경찰관 20년에 따라잡지 못한 단 한 번의 교통위반자가 있다면 바로 당신의 남편이오. 굿 럭 마담(부인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하며 사라졌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남에게 운전을 배웠지만 남편과는 반대로 얌전하고 비단처럼 부드럽게 운전해 `실키 드라이버`라는 별명을 우남이 지어준 일화도 유명하다. 조국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남의 바쁜 스케줄을 도와 프란체스카 여사는 1 4역을 했다. 때로는 우남의 운전사로 비서로, 타이피스트로 그러면서 주부의 자리를 지키며 일평생 동안 우남의 분신이 되어 헌신적인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우남은 대통령이 된 후 625 전쟁까지 종종 손수운전을 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측의 교란작전으로 남한군이 곤경을 겪고 있을 때, 남한군은 미군을 피난민으로 가장시켜 교란작전을 펼 계획을 세웠지만 주한미국 대사이던 무초가 이 요구에 응하려 들지 않아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보고받은 대통령은 분노가 폭발했다. 순간 밖에 서 있는 지프에 급히 오르더니 질풍노도처럼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흙탕물을 튀기며 사납게 지프를 몰고 달리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대사는 그 자리에서 당장 남한측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다. 이것이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손수운전이었다고 한다.



 

[출처] 월간 <자동차 생활> 198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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