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미국식 졸업식에서 한국 최초 영어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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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이야기-이승만 '스타 탄생’
▲ 배재고교 자리에 남아있는 동관 건물 (1916년 건축). 현재 배재 역사박물관이 되었다.
조선왕국 ‘정치 1번지’로 변한 정동거리에 조선500년 최초의 색다른 행사가 벌어졌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긴지 6개월째 되는 여름 날 1897년 7월8일 정동감리교회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열린 것이다. 배재학당이 개교 12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학교식의 졸업 행사를 마련한 것. 1년전 ‘독립협회’를 출범(1896) 시킨 개화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서구화 물결의 급진전을 상징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예배당엔 태극기와 미국기가 높이 걸리고 조선어와 영문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나눠주었다. 배재학당 당장(堂長) 아펜젤러 사회로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하객은 예배당과 정동거리를 꽉 메웠다. 배재학당 교명과 액자를 내린(1885.6.8.) 고종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왕실 명사들과 궁내부 대신 이재순등 대신들이 모두 참석했다. 중추원 의관등 정치인과 관리들, 각국 외교관들 부부, 귀족 자제등 600여명이 몰려 들었다.
하이라이트는 졸업생 대표 연설, 이승만이 단상에 올랐다. 그가 입을 열자 모두 놀랐다. 영어 연설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목은 당시 시대의 키워드 ‘조선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Corea)'. 이승만은 조선과 중국 관계, 청일전쟁의 결과 및 당면 과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청중들은 계속 놀랐다.
첫째 영어연설이란 충격, 영어에 능한 서재필이나 윤치호가 외국에서는 했지만 국내에서 한국인이, 그것도 22세 학생의 유창한 영어에 모두 신기한 듯 감탄했다.
다음으로 연설 내용, 자주-자유는 물론 부국강병책에 이르기까지 국가개혁 주장에 깜짝깜짝 놀랐다. 숨죽였던 하객들은 연설이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또 한번 놀랐다. 이승만이 ‘독립가’ 노래를 영어로 부르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이날 일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의 연설은 창의적이다. 조선과 중국관계, 위태로운 현상황과 독립과제의 논의를 전개한 거침없는 말에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뜻이 훌륭하고 영어도 알아듣기 쉽게 하였다고 외국인들이 매우 칭찬하더라. 윤치호씨도 ‘조선의 독립’이란 연설이 매우 좋았다고 일기에 적었다고 하더라.”
아펜젤러는 그가 발간하는 ‘코리안 리포지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숙한 이 졸업생대표는 ‘조선의 독립’을 연설제목으로 택했다. 이것은 조선에서 처음 거행되는 대학(College) 졸업식 연제로 매우 적절하다. 독립만이 이들 젊은이들이 교육받은 것을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줄 것이다. 이승만의 어법은 훌륭했고 감정도 대담하게 표현했으며 발음도 깨끗하고 명확했다.”
아펜젤러는 또한 '조선휘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 정부와 외국 공사의 주요 귀빈들이 참석한 이 날의 졸업식에서 이승만의 연설은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었다. 그의 거침없는 말들은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행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 배재학당 건축 공사장. 까만 양복차림의 인물이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선교사.(1980년대 후반)
◆ 영어 사전을 통째로 외워버린 이승만...타고난 집중력. 영어공부 2년만에 어떻게 이런 연설을 할수 있을까. 어려서부터 ‘글씨 잘 쓰는 신동’으로 소문난 이승만, 6살에 천자문과 통감을 떼고 8살 이전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마스터 했다는 천재소년, 그의 공부는 전통적인 외우기 방식이었다. 영어교재는 물론, 서양역사 지리등 원서들과 사전까지 통째로 외워버렸다. 입학 6개월만에 영어 ‘보조교사’ 발령을 받은 그에게 선교사-교사들은 교내 영어신문등 영어로 해야하는 작업은 이승만에게 도맡기다시피 했다.
“그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딴 아이들이 놀 때 꽃이나 나비를 그렸고 서당 선생님 초상을 그리는데 열중했다. 나비는 특히 그가 잘 그리는지라 친구들은 ‘이(李)나비’라고 놀렸다. 또 틈만 나면 몇 시간이고 연날리기를 좋아했다. 그림이든 연이든 글읽기든 한번 열중하면 아무것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땐 2주동안 삼국지(三國志)만 읽고 또 다른 소설을 그렇게 읽곤 했다. 서당 일꾼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졸라서 노래가사를 적은 노트가 책이 될 정도였다. 어디서 캐오는지 꽃을 서당 마당에 계속 심으니 선생님이 ‘꽃에 미친 놈’이라 불렀다.”
(서정주 저 ‘이승만 박사전’ 1949)
◆ 새로운 세상 발견, 자유민권주의자로 급변
“입학당시 욕심은 영어 하나만 잘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 개념이다.” (이승만 회고담)
아펜젤러, 노블, 에비슨등 여러 선교사들을 통해 이승만은 새로운 세계에 빨려들었다. 특히 미국역사, 독립투쟁, 자유민권, 선거 민주주의, 사법제도, 국민 인권등 꿈 같은 문명세계의 문물을 굶주린 듯 흡수하였다. 단발령때 그의 상투를 잘라준 에비슨과는 절친한 친구로 “임금 없는 국가체제”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또한 서재필의 강의와 그가 만든 학생토론회 ‘협성회’를 이끌고, ‘독립협회’일을 맡아 ‘독립신문’에도 기사와 논설을 국-영문으로 쓰면서 이승만은 졸업전에 이미 개혁파 학생세력의 대표였으며 신세대 리더였다.
졸업식 영어연설을 알아들은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그것은 이승만이 각국 대표 앞에서 ‘조선 독립’을 강조함과 동시에 왕실-내각을 향한 선전포고!
평생에 걸친 독립투쟁과 정치투쟁의 신호탄이었다.
<출처> 인보길의 역사올레길 ©시장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