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없는 폐허의 나라에서 무한한 에너지원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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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전력난을 해결해야 했다.
1956년 미국의 전기 기술 전문가 시슬리 박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다"라고 소개했다.
원자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슬리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물었다. "그거 지금부터 시작하면 몇 년 뒤에 써먹을 수 있는 거요?" 시슬리 박사는 "한 20년 쯤 걸린다"고 대답했다.
원자력이 가진 잠재력에 주목한 81세의 노(老)대통령은 원자력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이승만은 즉각 우수한 과학인재를 모아서 1인당 6000달러의 거금으로 국비유학을 보내게 된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 남짓하던 시절이었다. (4년간 8차례에 걸쳐 150여명을 보내게 된다.)
20달러 이상의 외화를 지출할 때에는 자신이 직접 사인을 할 정도로 달러를 아꼈던 분이 미국 영국으로 원자력을 공부하러 나가는 유학생들을 친히 경무대로 불러 "너희들에게 나라의 장래가 달려있다. 열심히 공부하라"면서 달러가 든 봉투를 쥐어줬다.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세계 최극빈국에서 최첨단 미래 에너지 기술을 도입, 개발에 나선 것이다.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위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35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1959년 7월 연구용 원자로 설치공사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했다.
고리원전이 가동에 들어간 것은 1978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지 22년만이었다.
시슬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 20년 걸릴 것"이라고 얘기한 그대로였다.
고리1호기 가동으로부터 32년이 지난 2010년 아랍에미레이트연방(UAE)에 원전을 수출하게 된다.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야기다. 나라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각자들이 한 세대, 두 세대 앞을 보면서 투자하고, 계승해가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달러가 든 봉투를 받아들고 눈물을 삼키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넜던 젊은 공학도들의 열정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가 현재 원자력 선진국이 된 것은 이승만 덕분이다.(한국 수력원자력 세계2위) 1950년대부터 이승만은 원자력에 엄청난 투자를 하였는데, 당시 정부조직 전체 1~2급 공무원 110여명 중 원자력원에 소속된 1~2급 공무원만 20명이 넘었고, 봉급도 3배가 넘었으며 배정된 예산도 1억 4천만원으로 중앙공업연구소 예산 200만원의 70배에 달했다.
▲ 한국 최초의 원자로 '트리가 마크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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