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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편지에서 드러난 사실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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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대통령에서 탄핵된 이승만에게 조소앙이 '쿠데타' 건의 

유석재 /조선일보 기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 박사가 소장했던 문서 10만여점 중 1899년부터 1945년까지 주고 받은 편지와 관련 인물들의 서한 등 666통의 내용이 모두 실체를 드러냈다.

여기에는 한국 독립운동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편지들은 ▲이승만 박사가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면서 이들을 집권(執權) 기반으로 육성해 나갔으며 ▲상해(上海)와 중경(重慶)의 임시정부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 편지들은 이 박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 116통과 받은 서한 403통, 제3자 사이의 서한 147통이다.
 
1급 사료(史料)에 해당하는 이 편지들의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대부분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초서체(草書體) 한문과 흘림체의 국한문으로 쓰였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거의 알 수 없었다.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소장 이정민)는 한글·국한문·한문으로 쓰인 이 편지들을 일일이 판독하고 탈초(脫草·초서로 된 글씨를 풀어씀), 번역하는 5년 동안의 작업 끝에 처음으로 그 내용을 공개했다.
이 결과물은 세 권 분량의 '이승만 동문(東文) 서한집'에 수록, 20일 출간됐다. 편찬에는 유영익(柳永益) 전 연세대 석좌교수, 송병기(宋炳基) 단국대 명예교수, 이명래(李明來)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오영섭(吳瑛燮) 연세대 연구교수가 참여했다.

서한집에서 새로 드러난 중요한 사실들을 뽑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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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2월18일 이승만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임시정부의‘대통령’이라는 호칭과 공채금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제공




조소앙, 이승만에게 쿠데타를 권하다

"전날 말씀드린 대로 선포문을 발간하십시오. 전후 내막을 폭로해 내외 동지의 굴기(벌떡 일어섬)를 고취하며 일면으로 무사(武士) 기십 인을 지휘하여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인장(印章)을 압수하고 즉각 내각을 발표하여 정령을 반포하면 현 정부는 와해될 것이오니…." 1925년 5월 16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정 지도자 조소앙(趙素昻)은 임시정부에 대한 무력 쿠데타를 권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방안으로 하와이에서 임시 의정원을 소집해 새 정부를 조직하자는 급진적인 '권력 만회 구상'을 펼쳤다. 상해 임시정부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면직하고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승만은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돼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상해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서한집의 편지들에는 당시 이승만이 곧바로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워싱턴에 눌러앉아 구미위원부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발생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애당초 이승만의 구상이 워싱턴에서 상해 임정을 '원격조종'하며 통치하려던 것이었음도 드러내고 있다.

서한집은 또 이승만과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사이에서 독립운동 방략, 공채금의 수납·지출 방법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의견 대립을 적었다. 이승만은 1925년 3월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창호가 미국에서 추종자들을 시켜 한인으로부터 인두세(人頭稅)를 거둬 임정으로 보낼 것'이라며 그의 행동을 은근히 비난했다.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임정으로부터의 신뢰가 떨어진 이승만은 1925년 3월 탄핵을 받고 대통령에서 면직되지만, 조소앙의 편지에서 보듯 이승만이 임정 내 기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임정 국무위원 이시영(李始榮)도 편지에서 탄핵을 '정변(政變)'이라 표현하고 이승만의 상해 복귀를 촉구했다. 서한집의 다른 편지들은 이승만이 상해로 가기 전부터 '통신원'들을 통해 임정의 기밀 정보를 확보함으로써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기록했다.

이상재와 한용운, 이승만의 손을 들다

이승만이 서울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통해 국내의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던 사실도 이 편지들을 통해 드러났다. 1921년 7월 29일 이상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지난 5월에 길씨(吉氏·미상) 편에 (보내 주신) 은화 4천원(元)은 즉시 길씨로 하여금 재무총장 이시영,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국무총대리 신규식(申圭植) 합석한 중에서 친히 전하여 영증(領證)을 받게 하였으니 염려없이 믿고 전하게 되었으며…"라고 썼다.

이승만에 대한 이상재의 지원 또한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두 사람에게는 기호 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기반으로 한 지도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재측은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의를 앞두고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열명청원서(列名請願書)'를 만들어 보냈다.

이상재뿐이 아니었다. 상해의 반(反) 이승만 세력이 임정의 개조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열던 1923년 1월 이상재, 최남선(崔南善), 오세창(吳世昌), 한용운(韓龍雲), 박영효(朴泳孝) 등 국내 인사 6명은 '경고해외각단체서(敬告海外各團書)'를 마련해 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배포했다. 서한집에 전문(全文)이 담긴 이 문건은 '지방별로 분열하는 것을 배제하고, 이미 성립된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이해 3월 이상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서에 대해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해 눈물마저 흘렀습니다"고 쓴 것은 문서 목적이 이승만을 지원하는 데 있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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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스스로를‘동생(弟)’이라 낮추면서‘엄동에 겹옷도 입지 못하는’임정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제공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이 되시오"

이처럼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국내 인사들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으면서 장기적으로는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해나가고 있었다. 이승만이 1920년 미국 디모인에서 열린 미국 감리회 4년 총회에 한국 총대(總代)로 참석한 오기선(吳基善), 김영섭(金永燮) 등 국내 감리교계 지도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도 편지에서 밝혀졌다.

이승만은 중앙학원 설립자 김성수(金性洙), 신간회 총무간사 안재홍(安在鴻) 등과도 은밀히 교신했다. 그 매개역을 맡은 사람들은 1925년과 1927년 호놀룰루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백관수(白寬洙·조선일보), 송진우(宋鎭禹·동아일보) 등의 언론인과 뉴욕에서 유학하던 장덕수(張德秀)였다. 이승만은 안재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하와이에서 만든 동지회(同志會)와 국내의 좌우 합작 단체인 신간회의 협력을 모색했다.

훗날의 '국가원수' 자리를 대비할 것을 노골적으로 권유한 사람들도 눈에 띈다. 미국에서 유학한 뒤 1937년 귀국해 YMCA 부총무 등을 맡게 되는 윤치영(尹致暎)은 1927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를 나폴레옹, 무솔리니, 케말 파샤 등에 비견하며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국부(國父)로서 건국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김구 "동생의 충정을 알아주십시오, 선생님"

"제(弟)나 석오(石吾·이동녕)가 …엄동(嚴冬)에 겹옷도 입지 못하고 떨면서 이 편지를 쓰는 충정도 좀 알아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시)정부 집세로 소송을 당하게 되었으니 수령(首領)을 지낸 선생님인들 마음에 어떻겠습니까."
1928년 11월 20일 임정 국무령이었던 김구(金九)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다. 한 살 적은 김구는 편지에서 스스로를 '동생'이라 낮추고 이승만을 '선생님'으로 높이며 임정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 이승만이 김구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랐다. 그는 편지에서 김구를 '인형(仁兄)'이라 불렀는데 이는 친구 정도의 사이에서 서로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서한집은 이승만이 1928년 이후 태평양전쟁 시기까지 임정의 김구·조소앙과 계속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해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7년 10월의 편지에서 김구는 중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독립운동 단체들 사이에 통일운동이 진전되고 있음을 알리고 이승만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이 편지에서 김구는 '절대비밀에 속한 금전이 아니면 일을 꾸미기 어렵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의 근본적인 노선 차이도 드러난다. 김구는 1939년 6월 호놀룰루의 동지회 중앙부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의 비폭력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에 직결된 사업에 치중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두 달 뒤에 김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은 민중이 전쟁을 결정하는데, 신문에 날마다 일본인의 만행을 알리면 정부와 국회에 영향을 미쳐 정책을 바꿀 것임을 아직도 모르는가'라며 자신이 주력하던 외교·선전전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그 밖에 드러난 사실들

서한집은 이승만이 대한제국 정부 개조운동의 실패로 1899~1904년 한성 감옥에 수감됐을 때와 1904~1910년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그의 집안이 민영환(閔泳煥), 한규설(韓圭卨), 이지용(李址鎔) 등의 대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승만과 함께 감옥 생활을 했던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은 1903년의 편지에서 "이군의 지기(志氣)의 확고함과 언론의 명쾌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용동(聳動·몸을 솟구쳐 움직임)하고 흠앙(欽仰·공경하여 우러름)케 한다"며 젊은 이승만의 사람됨을 극찬했다.

편지들은 또 이승만이 1920년 호놀룰루에서 '이맥이'라는 여성으로부터 구애를 받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신규식의 조카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신형호(申衡浩)는 1922년 5월 2일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글 타자(打字) 관련 문건을 첨부했는데, 이는 당시 이승만 주변의 인물들이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재미교포 이원익이 영문 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인 타자기를 개발한 지 8년 뒤의 일이었다.

편지들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서한집에 실린 편지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소장하고 있던 '이화장 문서' 10여만 점의 일부다. 이 자료는 두 차례 없어질 위기에 처했었다. 6·25 발발 직후 경무대(현 청와대)에 있던 문서들이 긴급히 진해로 옮겨지면서 화마(火魔)를 피했다.

문서들은 1960년 이 전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사저인 이화장으로 옮겨졌다가 윤보선 대통령 취임 직후 이화장의 가재들이 경무대로 실려갈 때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李仁秀)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의 전 비서 황규면(黃圭冕)씨가 은밀히 이 문서들을 서류 캐비닛에 담아 왕십리의 김종완(金鍾完)씨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문서들은 1962년 7월 이화장으로 돌아왔다가 1997년 11월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로 이관됐다. 1994년부터 문서 정리작업이 시작됐고 1998년 편지들이 영인 출간됐으나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유영익 교수는 이 편지들에 대해 "몇 차례의 산실(散失)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면서 보존된 국보급 사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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