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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선물, ‘太平洋은 우리 바다’ [이한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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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

우리는 언제부터 태평양을 '우리 바다' 처럼 여기게 된 것일까?  

이 말은 대서양이나 인도양은 멀게 느껴지는데 태평양 하면 심정적으로 우리 바다처럼 느낀다는 뜻에서다. 바다에 대한 심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어 섬들을 무인도로 만드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한 쇄국 조선은 아니었을테고, 일본이 식민지 조선민족을 위해 태평양을 가깝게 느끼도록 가르쳤을 리는 더더욱 없다. 시기적으로 짚어보면 1950년대 이승만 시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전두환 정권 시절 캠페인 차원에서 '아시아 태평양 시대' 라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기는 했지만 이미 그때쯤이면 ' 태평양은 우리 바다' 라는 의식은 국민들 사이에 깊이 자리잡은 다음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줄곧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공간이 태평양 한복판의 하와이였다. 또 그가 그 곳에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간행했던 독립 정신 및 국제 정세의 계몽잡지 이름도 '태평양주보' '태평양잡지' 였다. 어쩌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인이 태평양을 우리 바다로 여길때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보았는지 모른다. 그 후 대통령에 오른 지 1년도 안 된 1949년 3월 18일 미국을 비롯한 12개국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라는 지역 집단 안보 체제가 결성되자 이승만은 즉각 중국의 장개석 총통 및 필리핀의 키리노 대통령과 더불어 '태평양동맹' 이 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구상은​ 미국의 소극적 태도로 성사되지 못했고 오히려 한국 주둔 미군을 철수함으로써 북한군의 남침을 불러온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6.25 전쟁을 끝맺으며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 1953년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좌절된 태평양동맹을 한국과 미국 단위에서 구현한 외교적 쾌거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따지고 보면 쇄국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국인으로 하여금 태평양이 우리 바다이며 따라서 미국을 저 먼 바다 끝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바다 저편에 잇는 이웃 나라로 느끼게 함으로써 한국인의  '우물 안 개구리 정신'을​ 산산 조각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은 이승만에 대한​ 미화가 아니라 의미의 재발견이다.

기자는 20년 전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1년간 신문에 연재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에게 태평양을 선물로 주었다는 생각은 얼마 전까지 하지 못했다. 늦기는 했지만 이승만이 6.25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反共을 고리로 삼아 '아시아 태평양'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회담이나 구상들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그가 태평양을 우리 바다로 만들기 위해 했던 노력은 재평가돼야 한다.

이 문제는 과거사에 관한 평가 논쟁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인도양을 '우리 바다'로​ 느끼게 하기 위한 국가 지도자 차원의 어떤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인도와의 정치.경제.문화적 관계를 몇 단계 높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도 훨씬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 인도양도 우리 바다' 라는 식으로 정신적 생활 공간이 확정되면 다음 세대 한국인 들은 미국.중국에 이어 인도에서도 새 기회를 찾을수 잇다. 다행이 우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도와의 관계도 가까웠다.




[출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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