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제임스 게일과 청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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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제임스 게일 (James S. Gale , 奇一 , 1863-1937)
우남이 회심(悔心)하는 과정과 출옥한 이후에 세례를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하는 과정,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YMCA에서 학감(한국인 총무)으로 일하는 모든 과정에 우남의 성장을 지켜보고 우남을 돕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은 바로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이라는 분이었다. 게일은 우남을 만난 이후로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우남의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특별한 후견인(後見人), 멘토의 역할을 했다.
1. 게일의 생애
게일은 1863년 2월 캐나다 온타리오 주 엘마(Elma)에 개척 농장에서 장로교회 장로인 아버지의 5남 1녀의 자녀 중 다섯 번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884년 토론토 대학에 진학하였고 대학에 재학 중에 프랑스에 가서 불어를 공부하고 선교(宣敎)단에서 일하면서 교파를 초월한 선교방법을 배웠다. 1886년 북미 하령회(夏令會)에 참석해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외지 선교를 할 것을 결심하였다.
토론토대학 기독교 청년회(YMCA)의 지원을 받고 평신도 선교사로서 25세의 나이로 1888년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게일은 조선어를 배우기 위하여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깊은 시골로 들어갔다. 조선에서 개신교회가 철음으로 세워진 솔내마을로 공부를 하러 간 것이다. 그는 솔내에서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도인 서상륜의 집에 하숙을 하면서 조선어를 상당히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머물렀다. 후에 게일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외국인 한국어 학자로 간주 되었는데 한자(漢字)에 대한 지식은 그 어느 외국인도 따라갈 수 없었다. 솔내에 있는 동안 그는 전적으로 조선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1889년 3월 황해도 소래에서 평생의 조사(助事)가 된 이창직을 만나 한글, 한문, 풍습을 공부하고 마침내 1900년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게일은 자신을 파송한 토론토대학 청년회에서 선교비가 끊어지자 1891년 미국 북장로교회로 전직(轉職)하였고,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1897년 5월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39년간 사역하다가 영국의 베스(Bath)라는 곳에서 십 여년 동안 아내와 더불어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74세를 일기로 오르몬드 로지(Ormond Lodge)라는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2. 게일의 사역(使役)
게일은 부산(1889-1891), 원산(1892-1897), 서울(1900-1927) 평양등지에서 사역하였다. 연구와 탐사를 위해 걷거나 말을 타고 한반도를 무려 25회나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정리하면 ①지역 순회전도 활동과 연동교회에서의 목회활동 ②예수교 학당인 경신(敬信)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의 교육활동 ③한국학 연구와 저술활동 그리고 성경번역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게일은 교육에 뜻을 두어,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후에 피어선 성서신학원 원장으로 교육 일선에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게일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남긴 공헌, 특히 문서분야의 공헌은 아무리 칭찬해도 과(過)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의 사역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담임한 연동교회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국전체를 상대한 큰 그릇으로서 선교하는 것(선교사)과 가르치는 것(교육가), 글을 쓰는 것(저술가)이었다.
3. 게일의 번역 및 문서 활동
천성(天性)이 학자로서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가 대단해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4시까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는 서양에서의 한국학의 효시(曉示)라고 지적될 수도 있는 훌륭한 저서들을 많이 저술했는데 그의 번역물인 『텬로역정(天路歷程)』은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선비들을 개종(改宗)시키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책자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순례자의 과정(Pilgrim's Progress)’의 번역물인데 기독교인이 수많은 유혹과 역경을 헤치고 천성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한성 밖의 세상에서도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혀진 책이었다. 게일은 문인(文人)으로서 수많은 책을 썼는데 그 중 『코리언 스켓치』라는 책은 구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책이다. 모두 43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4. 게일과 옥중에 있던 양반들과의 만남
게일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수시로 감옥을 찾아가 성경 및 기독교 서적을 차입해 주고 전도하였다. 게일은 한국인 개혁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개혁파 정치인들과 개인적인 신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1989년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사건으로 한성 감옥에 전후에 투옥된 후 옥중에서 선교사와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예수 믿기를 결심하였는데 감옥 안은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토론하는 옥중학교, 옥중 도서실로 인해 화해, 감격과 감동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게일은 그의 저서 『전환기의 한국』에서 복당(福堂: 한성감옥)에 모인 정치범들의 성경연구 및 기도반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벙커 목사 부부가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이들〔이승만, 유성준, 김린,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등〕의 감옥은 처음에는 ‘진리 탐구의 방(an inquiry room)’으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이 되고 그 다음에는 ‘예배당(a chaple for religious exercise)’으로 바뀌었다가 급기야 ‘신학당(a theological hall)’이 되었다. 이 과정을 끝내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감옥에서 내보내어 사역하도록 하셨다. 그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우수한 한문 실력 때문에 이 나라 수도의 기독교계에서 최초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1901년 3월 귀양살이에서 서울 감옥으로 이송된 이원긍은 게일 등 선교사들이 찾아가 간절히 예수 믿기를 권함으로써 점점 뜨겁게 감동되었다. 1902년 두 번째 투옥된 이상재는 성경을 읽는 도중 마태복음 5-7장에 감명을 받은 뒤, 벙커 목사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옥중 세례(洗禮)를 받았다. 그는 출옥한 후에 게일을 찾아 연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역시 1902년에 투옥된 김정식은 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 목사의 끈질긴 전도에 의해 〈무디의 설교집〉을 읽고 개종하였다. 그는 후에 일본에 있는 한국 청년기독교회(YMCA) 총무가 되어 기독교 지도자로 평생을 헌신하였다.
한성감옥에서 출옥한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은 출옥 후 연동교회에 있던 게일을 찾아 갔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옥중에서 신자가 된 사대부들이 선비 못지않게 박식(博識)하고 개방(開放)적인 게일 선교사를 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이들보다도 출옥시기가 늦었던 이승만도 석방 후 게일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게일의 전기를 저술했으며, 한국에 와서 성공회 신부로 지낸 러트(Richart Rutt)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연못골교회(연동교회)는 새로 기독교에 입교한 독립협회 회원들의 집합처럼 되었다. 그들은 일찍이 과격한 정치 운동을 하다가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살이를 하던 사람들이다. 게일은 특히 이원긍, 즉 학자이며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유명한 사학가 이능화의 부친을 좋아했으며, 일찍이 경무관 벼슬을 지낸 김정식, 초대 우정국장이며 한국 초기의 초창기의 신교육과 독립협회 창설에 주동 역할을 한 이상재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게일은 이승만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이 개화파 지도자들은 상류 지식인들로 기독교 신자가 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의 몇 사람은 다년간 연못골에다 교적(敎籍)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게일이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며 확신을 갖게 된 점은 그들의 교육사상과 종교 사상이었다.”
5. 게일에 대한 평가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략 1500여명으로 산정하는데 그 중에서 게일 만큼 특이한 선교사는 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일(奇一)이라는 그의 이름처럼 기(奇)이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탁월한 언어학자로, 저술가로, 번역가로 목회자로 한국학의 대가(大家)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게일 목사는 당시의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다른 선교사들보다도 한국어에 능통하였고,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그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학 등 한국의 거인(巨人)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상당한 식견(識見)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이 성서 중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게일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을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구한말에 누구보다도 서양 문명과 사람들에 대하여 정통하였던 윤치호(尹致昊)는 “게일 박사는 상상 이상의 박식(博識)가요 문학가입니다. 지금까지 조선에 온 서양 선교사로는 그 재주와 박식에 있어서 씨(氏)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고 하는데 게일은 조선 문화의 예찬(禮讚)자이었고 조선문학과 명현들의 경전(經典)에 통달한 거인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에 대한민국의 큰 지도자가 될 우남의 잠재력(潛在力)을 알아보고 그의 신앙적 인격적 성장을 도운 것은 게일의 커다란 공로(功勞)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교수로 평생 동안 선교사 게일을 연구한 유영식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게일은 선교사인 동시에 문인이었다. 당시 조선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은 고전번역, 사전편찬 등 여러 업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한국화’를 강조한 분으로 한국의 근대화(近代化) 시기에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다.”고 설명했다.
6. 이승만과 게일의 멘토링 관계
정부 타도를 획책했다는 황국협회의 무고로 1898년 11월에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은 우남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승만에게는 마음의 해방이 생겼다. 그것은 기독교로 개종(改宗)한 일이었다. 이것은 1904년 장로교 목사 제임스 S. 게일의 조력(助力)에 의한 것이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하자 급격한 정치적인 변혁으로 정치범에게 석방의 특사가 내려지자 가장 늦게 출옥한(8월9일) 우남은 게일 목사를 찾아가 그의 지도와 세례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게일 목사는 그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으므로 감리교회에 우선권이 있다고 세례 주는 것만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게일은 우남이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게일의 편지를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 편지는 우남이 미국으로 출국 할 때에 지닌 것으로 후에 그에게 세례를 준 장로교 계통의 햄린(Lewis T. Hamlin) 목사에게 전달이 되었다.
게일은 우남이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하게 간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우남이 반도에서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중에 가장 앞서가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게일의 소개서를 받은 햄린 목사는 우남을 조지 워싱톤 대학의 총장이며 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인 찰스 니드햄 박사에게 소개해 우남은 장학생으로 2학년에 편입 할 수 있었고 세례는 같은 해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을 통해 워싱턴에 있는 커버넌트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Covenant)에서 햄린이 손수 베풀었다. 실제로 우남은 햄린과 자주 만나기도 하였고, 우남은 그에게 금전적인 도움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올리버가 수집한 기록에 의하며 햄린 박사는 1월 6일에 2달러, 1월 8일에 3달러를 우남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추천서를 통하여 장로교 선교사 게일이 얼마나 우남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를 사랑하며 우남의 장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가를 알 수 있다. 게일이 ‘이 분은 독립을 믿습니다’라고 한 표현은 이승만의 옥중생활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게일은 바로 우남의 이러한 뛰어난 점들을 간과(看過)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남은 하버드 대학 재학 시부터 졸업 후 자신의 진로문제에 대하여 서울에 있는 게일과 간간이 편지(便紙)로써 조언을 구했다. 게일은 한결같이 한국에는 할 일이 많다고 강조하면서 꼭 귀국하여 함께 일할 것을 권고하였다. 게일은 우남이 황성 기독교청년회, 즉 서울 YMCA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고 결국 서울 YMCA로부터 최종적 제의를 받은 우남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다음날(7월19일) 취임 수락의 편지를 썼다. 우남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YMCA의 한국인 총무로 활동하는 동안(1910-1912)도 게일과 자주 교제하였다. 게일이 교장으로 있던 정신여소학교와 경신남소학교 졸업식이 있을 때에 이상재와 더불어 참석해서 이상재는 기도순서를, 우남은 성경봉독(聖經奉讀)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남이 귀국 후에도 계속해서 게일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7. 맺음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27:17)
우남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에 그를 영적(靈的)으로 돌보았던 게일은 그가 회심(悔心)할 수 있도록 조력하였고,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남이 공부를 마친 후에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세운 YMCA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우남의 또 다른 스승이요, 멘토였던 것이다. 게일은 우남의 잠재력(潛在力)을 보았고, 그 잠재력을 개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분이었다. 게일이 가진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이 우남을 영적(靈的)으로, 인간적(人間的)으로 성장(成長)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게일의 수고는 초대 대통령이 된, 신앙인 우남을 통하여 이 땅에 지금도 가시적인 열매들로서 나타나고 있다.
※ 미국에 가는 우남을 위하여 게일이 써 준 추천서 I
워싱톤 및 미국 각지의 기독교인 형제들에게.
1875년 서울에서 출생한 조선인 이승만을 소개합니다. 그는 구식 한학 교육을 훌륭히 받았으나, 일찍이 현 시대의 세계에서 이것으로 부족함을 깨닫고 새로운 학문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영어와 여러 분야를 공부하는데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으며, 조선을 독립되어야 할 뿐 아니라 조선인들은 지둔(遲鈍) 함에서 깨어나 올바르게 사고하며 생존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일간지 매일신문(每日新聞)을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후에는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하여 영어 번역물을 싣는 한편 자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습니다. 이것은 보수적인 조정의 생각에 상반되는 것으로써, 이씨는 1897년 9월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7개월 동안 그는 무게가 20 파운드가 넘는 나무 칼(cangue)을 썼는데 여기에 고통이 더하도록 두 발에는 족쇄(Stocks)까지 채웠습니다. 그 동안 동료들이 끌려 나가 구타당하고 고문을 받아 혼절하거나 참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처형장의 둔탁한 칼 소리에 따르는 모든 감정을 알고 있었으며 이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 번 조간신문에 ‘이승만(李承晩)이 감옥에서 참수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깨에 두꺼운 쇠사슬을 묶고 뒤에다 맹꽁이 자물쇠가 채워진 채 죄수부대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만나 토론하고 담화하고 상호 발전을 기할 수 있는 민중 집회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투옥되기 직전에 복음을 들었습니다만 고통 속에서도 오직 믿음을 쌓아갔습니다. 즉 자신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복음전도에 나서자, 동료 죄수들이 구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해에서 그에게 보내온 중국서적으로 감옥에 도서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씨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 중에는 워싱턴 주재 초대 공사관 서기관 이상재 씨가 있습니다. 그 분은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지난번 세계 문학 작품집에 이름이 특기되어있는 이원종이라 사람과 1895-1896년 조선경찰 총수였던 김충직 씨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 수는 모두 40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모두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에 감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는 재판을 받고 장(杖) 일백 대에 종신중노동형(終身重勞動刑)을 선고 받았다가 지난 여름 (1904년 8월 9일)에 사면 석방되었습니다. 이 한 사람의 황인은 그가 겪은 시련을 생생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유로운 미국 땅에서 백인 형제들 중에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기를 바라며, 그가 그 곳에서 공부하고, 관찰하고, 저술도 하려는 3년 동안 용기를 북돋워 주어 귀국 후 그의 동포들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는 신사로 태어났고 학자이며 하나님의 종 기독교인이기에 아주 훌륭한 친구입니다.
제임스 게일 (James S. Gale) 장로교 조선 선교사, 선구자의 저자
1904년 11월 2일 서울에서
※ 미국에 가는 우남을 위하여 게일이 써 준 추천서 II
루이스 햄린 목사 (The Rev. Lewis S. Hamlin, D.D), 워싱톤 계약교회 (Church of the Covenant Washington, D.C.)
나의 친애하는 햄린 박사님.
저는 서울의 이승만을 소개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모국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고 가지각색의 물불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그가 정직(正直)하고 충실(忠實)한 기독교인(基督敎人)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정치범으로서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많은 죄수들에게 진리(眞理)를 알게 하였는데 지금 저의 교회의 으뜸가는 교인들 중에는 그가 인도(引導)한 사람들이 여럿 있고, 또 그가 인도한 사람들은 장로교회 중에도 있습니다.
이 씨는 몇 달 동안이나 족쇄를 차고 앉아 있었고, 또 쇠사슬에 묶인 징역수들의 중노동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도(半島)의 정직하고 총명한 청년들 중의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며 국회나 백성들의 모임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정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씨는 주께서 더 높은 사업을 위해 부르셨을 때까지는 정치개혁 운동가였습니다. 그가 석방된 후로 저는 각종 모임에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그는 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지극히 진실한 간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세례(洗禮)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시내에 여러 교회가 그의 사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들이 그를 교인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저에게 왔습니다. 저는 그에게 대한 권리가 가장 적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방 미국으로 떠나게 되어있는 그에게 미국에 도착 할 때까지 기다려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세례(洗禮)를 받게 되기 원하며 목사님께서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서 (이승만을) 자기 교회(敎會)에 받아들일 권리를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절친한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2, 3년간 일을 하면서 공부 한 후 돌아올 계획입니다. 저는 그가 당신으로부터 듣게 될 친절한 말씀과 당신의 도움들과 충고들에 대하여 그가 대단히 감사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의 최고의 존경하는 마음과 더불어 햄린씨께.
제임스 게일
1904년 11월 3일 서울에서
[출처] 뉴데일리 : 청년 이승만과 선교사 제임스 게일 '멘토링' 관계 / 옐림교회 김낙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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