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I stood alone (1953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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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1953년 8월 16일 미국 수도 워싱턴의 유력지 “이브닝스타(Evening Star)”의 일요판 “선데이스타(Sunday Star)”는 이례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특별 기고문을 7면, 21면, 22면 3면에 걸쳐 독점 게재했다. 1953년 7월 27일 대한민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미국, 중국, 북한이 정전 협정을 맺은 지 불과 20일 만이었다. 그 당시 조속한 정전을 요구하던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주요 일간지는 “호전적 늙은이”, “작은 독재자” 등 이승만을 향한 거친 말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 글에서 이승만은 그런 언론의 목적과 의도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면서 왜 자신만 혼자서 정전 협정을 거부하고 고독하게 투쟁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71년 만에 전문을 완역하여 한국의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이승만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헌정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승만이 희구했던 자유의 가치, 민주의 이상, 인권의 소망, 법치의 염원은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다. 그가 그토록 경계하고 비판했던 공산주의 이념은 20세기 인류사에서 무려 1억 명의 인명을 살상한 죽음의 극단론으로 판명되었다. 그가 “북진 통일”을 외치며 해방하고자 했던 북한은 지금도 인류사 최악의 공산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이 되어 인구의 10% 이상을 노예로 삼는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노예제 국가로 남아 있다.
바로 지금도 역사를 제멋대로 조작하고 편의적으로 왜곡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집단은 공산 세력의 기습 침략으로 사흘 만에 수도가 무너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전략적으로 급히 후퇴한 이승만을 “런(run)승만”이라 폄훼하고 조롱하고 있다. 스스로 조선노동당의 정치전(political warfare)에 놀아나고 있음을 그들은 언제나 깨닫게 될까? 한국 사람이라면 이승만을 비판하기 전에 그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한 사람인지 최소한의 공부라도 해야 한다. 자, 이제 1953년 8월 16일로 돌아가서 이승만의 육성에 귀 기울여보자.
“나는 왜 홀로 섰는가(Why I Stood Alone)!”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한국 서울에서
내 삶의 퇴조기에 나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계속 싸워야만 했다. 그 때문에 나는 많은 비판에 휩싸였다. 휴전 협상 과정에서 최근 한국이 취한 태도와 행동을 윈스턴 처칠과 같은 저명한 정치가는 ‘반역적(treacherous)’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단호한 태도가 공산 제국주의 폭정에 맞서도록 역사의 조류를 돌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히틀러에 맞서 홀로 계속 싸우겠다는 1940년 처칠 자신의 결정이 나치즘과 검은 폭정의 종식에 이르는 출발점이 되었음과 같다.
위대한 웅변가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왜 한 나라가 일시적 파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편이 투쟁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인지 전 세계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 처칠을 두고 “자멸적(自滅的, suicidal)”이라거나 “무모하다(reckless)”고 하는 말이 나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한국에서 발휘한 리더십을 두고는 이런 말들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내 나라 한국은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체결하여 히틀러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서도 불과 1년 만에 침략을 당해서 항전에 나섰던] 1940년의 영국이 그러했듯, 우리 스스로 자살행위라고 확신하는 유화적 정전 협정을 수용하기보다는 계속 싸우는 편이 최선이라 믿는다. 우리의 지속적인 저항이 시간을 벌어줄 것이고, 여러 사태의 압력 아래서 붉은 세력의 망동이 벌어지게 되면, 자유 진영의 다른 국가들은 공산 중국의 괴물들을 국경 밖 그들 땅으로 몰아내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공산 중국이라는 괴물이 또 다른 점령지를 뜯어 먹으면서 아시아 전체를 향한 힘과 먹성만을 키울 것이다.
“나는 결코 확신을 잃지 않았다(I Never Lost Confidence).”
나는 긴 세월 기독교 윤리와 유교 윤리를 모두 연구해 온 학자다. 이 두 철학에 뿌리박힌 격률은 미국인의 문구로 이렇게 표현된다: “옳음이 승리한다(right will prevail).” 결국 내 생애 58년 가까이 걸려서야 비로소 조선 국왕들과 일본인들의 반동적 지배로부터 남한만의 해방이라도 성취할 수 있었다. 나는 결코 옳음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잃지 않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내가 옹호하며 싸웠던 원칙들이 내가 죽은 뒤에야 실현될 듯 보이던 그 암울한 시절에도 늘 그렇게 믿었다.
우리 시대의 극동판 뮌헨협정처럼 보이는 휴전 협정을 거부한 우리 한국인의 동기에 대해 서방 세계에 너무나 심각한 오해가 있는 듯하여 참으로 유감이다.
정전 협정 원안의 구체적 쟁점을 따져보자. 수백만 중공군이 무력으로 점령한 북한 땅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고, 우리나라 안에서 붉은 적군(敵軍)의 지속적인 불법 주둔이 종료되어야 할 시한도 전혀 휴전 협정에 명시되지 않았는데, 그 누가 진지하게 공산 침략이 격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1950년 당시 우리나라는 50만가량의 북한 적병에 직면하고 있었다. 1953년 현재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중국과 북한의 연합 병력은 수적으로 최초 침략자들의 3배에 달한다. 새로운 공산 군대는 아시아 최초로 제트기를 가진 공군을 비롯하여 1급의 최신식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은 전선에서 최단 거리로 20마일 이내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 험악한 현실에 너무나 가까이 처해 있어서 붉은 세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이를 진보라 부를 수가 없다. 침략자가 다시 쳐들어올 경우 미국의 자동 지원을 보장해달라는 우리의 요구가 정말 그토록 터무니없는가?
다수의 유엔군 고위 장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38선 인근에 배치된 강력한 공산군 조직의 위협을 우려하고 있음을 나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공산 세력이 통제하는 북한 내 비행장은 남한뿐만 아니라 일본, 오키나와 등지의 미국 진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투쟁(The Struggle)
넓은 의미에서 한국과 우방국 사이의 유감스러운 의견 차이는 공산주의 폭정과 팽창주의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진단에 근거하고 있다. 현재 한국이 처해 있는 곤경은 압제에 맞서 투쟁하는 일개인으로서 직접 겪은 나의 초창기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1896년의 일이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의회를 갖춘 입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고 조선 국왕과 일본 고문관들의 독재적 방식에 항의하고 있었다. 조선 국왕이 우리 독립운동의 지도자 17명을 체포해 간 후, 나는 계속 대중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여러 날에 걸쳐 계속되었고, 때로는 수십만 군중이 운집하기도 했다. 독립투사들이 석방된 후에도 우리는 대중 시위를 이어갔다. 만약 우리가 해산하면 경찰이 절대로 우리의 재결집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마라톤 집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무력으로 집회를 해산시키려 한다는 경고를 들었다. 주변에서는 내게 집회를 그만 단념하고 몸을 숨기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정작 경찰이 나타났을 때 우리 집회의 대중은 똘똘 뭉쳐서 완강하게 저항했고, 경찰은 감히 군중을 공격할 수 없었다. 경찰은 민중의 결기를 보건대 진압을 행동에 옮기는 순간 전국적 봉기가 촉발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저항에 그들은 겁을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흔들렸다면 나는 길을 잃고 헤매었을 것이다.
한결같은 원칙(Same Principle)
내가 늘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건 아니다. 무자비한 통치자에 맞서는 모든 애국자가 그러하듯 나도 투옥되어 고문당하는 내 몫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원칙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승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그대의 적만큼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면 싸움을 시작도 하지 말라. 그대는 흔들려선 안 된다. 그 어떤 종류의 편의주의도 적에게 그대의 한계점을 노출하여 더 악랄하게 나오도록 적을 부추길 뿐이다.
이것은 어떤 괴상한 오리엔탈 심리학이 아니다. 역사적 유례들을 고찰하면 국가적 태세를 명확히 정립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1940년 프랑스 총리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 원수(元帥)는 “빈손보다는 반쪽이라도 얻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프랑스 절반을 독일 점령지로 내어주는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나치가 법적 재가를 얻게 되자 프랑스인의 저항 의지는 약해졌고, 무도해진 독일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 나머지 영토도 접수하고 말았다. 페탱은 이후 자기 국민에 의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한 국가를 ‘반은 노예, 반은 자유 상태(half slave, half free)’로 남겨둠으로써 빚어지는 비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도 여러 사례를 통해 거듭 입증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붉은 진영과 자유 진영으로 분단하는 조치는 결국 분란만 낳았다. 왜 한국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야 하는가? 우리는 분명히 안다. 공산주의자들의 철권통치를 맛보고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북한 주민은 오직 압제의 공포와 모욕을 몸소 맛본 자들만이 품게 되는 강렬한 열망으로 자유를 희구한다는 사실을.
최대한의 힘(Maximum Power)
한국은 3차대전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공산 침략자를 국경 밖의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그가 국제연합이 실제로 작동함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고 확신한다. 만약 유엔이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최대한의 힘을 발휘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한다면, 중국의 붉은 무리가 6개월 안에 코리아에서 물러갈 것이라 믿는다. 끝없는 망설임과 흔들림은 나약함의 징후이며, 붉은 세력은 결코 이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먹을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적화 침략을 부추기고 공산 세력에 유리하게 이 세계의 세력 균형을 교란하여 3차대전의 발발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현장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자기기만은 언제나 더 쉬워진다. 지난 1945년, 이미 나는 많은 욕설을 들었다. 미국이 러시아와 합의하여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목적으로 코리아를 점령하기로 한 결정에 대하여 내가 강력하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관리들은 그것이 일시적인 편의상의 조치일 뿐이고 러시아가 해당 지역을 계속 장악하도록 용납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장담하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미국의 의도는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붉은 세력의 북한 장악이 “일시적으로” 허용되고 나자 미국은 그 어떤 평화적 수단으로도 그 세력을 흔들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정치적 협의를 통해 중국을 설득해서 북한에서 물러가게 할 수 있으리라고 진심으로 기대했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해진 오늘의 중국이 대체 왜 갑자기 북한을 떠나려 하겠는가?
물론 나 역시 나만의 이기적 야심을 채우려고 홀로 버티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에 맞서기가 고통스러웠다. 내가 편의와 안락과 권력을 원한다면, 절반만 얻는 편이 더 간단하지 않겠는가? 내 세상이 끝난 다음에 공산주의의 홍수가 덮치기를 희망하며 더 싸우지 않고서 여생을 살다 가도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평생을 대의에 바친 사람이 막바지에 이르러 세속적 안락을 바라고 단념할 순 없다.
협박은 안 통한다(Threats Don’t Work)
우리에게 원조와 지지를 끊겠다고 암시하는 등 갖은 협박으로 우리를 좌우하고자 했던 서방 정치가들은 우리를 완전히 잘못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협박은 한 국가가 자유를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원대한 신념보다 일시적 유불리만 따지는 나라들에만 통할 뿐이다. 한국에 대한 유엔의 지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치르는 비용이 붉은 세력에게 그런 우위를 점하게 하여 그들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우리를 압도할 수 있다면?
상황이 더 악화되어 한국이 혼자서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면, 우리의 운명이 마침내는 선의를 가진 모든 나라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우리는 고독하게 싸워나갈 것이다. 우리는 특히 미국이 독재정권들과 공화국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 지구적 내전(global civil war)에서 우리가 아는 자유의 존속 여부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붉은 세력의 침략을 막는 데에 달려 있음을 잘 알리라고 믿는다. <끝> (번역: 송재윤·이동민)
[출처] 조선일보 편집 발췌 “자유 투사” 이승만의 절규, “나는 왜 홀로 섰는가!”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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